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질적성장론이 5년 만에 최대 시련기를 맞고 있다.

'헤이마오 바이마오론'(黑猫白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다)을 내세우며 성장제일 노선을 걸어온 중국은 후진타오 주석이 2003년 최고지도자로 올라선 이후 질적 성장을 중시하는 '하오마오론'(好猫論.좋은 고양이만 키운다)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외부 상황은 만만치가 않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5년 만에 두 자리 고성장 시대가 마감하면서 주룽지 전 총리의 성장 위주 노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강하다. '식물공장'으로 변해버린 중국의 제조 허브 광둥성은 후 주석의 질적성장론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청바지 한 장에 10위안(2000원),신발은 6위안(1200원)에 살 사람 좀 구해줘요. " 24일 중국 광둥성 둥관시에서 만난 대만 기업인 쩡핑훙씨(41)는 기자에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청바지는 5만장이 있고 신발은 2만켤레를 갖고 있다고 했다. 쩡씨가 예정대로 미국에 수출했으면 청바지는 한 장에 15달러(102위안)는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바이어가 갑자기 수입을 취소하는 통에 재고만 안고 있다고 고개를 떨궜다.

쩡씨만 떨이를 하는 게 아니다. 중국 3위 수출도시 둥관 전체에서 떨이가 진행 중이다. 올 초만 해도 공장마다 내걸려 있던 '자오궁'(招工.직원모집)이란 플래카드는 '창팡자오쭈'(廠房招租.공장임대)로 바뀌어 있었다. 시 외곽 쪽으로 나갈수록 문을 닫은 공장은 점점 많아졌다. 광저우와 둥관의 경계지역인 쩡흥공업구는 몇 달 전 ㎡당 15위안(3000원) 하던 공장 임대료가 6위안(1200원)으로 떨어졌다.

둥관 시내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번화가인 후제 상가를 점령한 것은 세일 간판이다. 상점마다 50%,70%씩 세일한다는 문구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길가에는 할인판매를 알리는 간판을 들고 서 있는 아르바이트생도 많았다. 이곳의 한 식당 주인은 "작년에 비해 매출이 절반이나 줄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쓰나미는 둥관을 이처럼 초토화시켰다. 정확한 통계는 발표되지 않고 있지만 1만개 이상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는 게 정설이다. 문을 연 기업들도 대부분 절반만 가동하는 등 식물인간 아닌 식물공장 상태인 곳이 많다고 이곳 사람들은 전한다.

중국 수출의 28%를 차지하는 중국 최고 수출기지인 광둥성 전체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두 달 새 무너진 회사가 7만여개에 이른다는 소문이다.

파산 도미노를 막으려는 필사적인 '인공호흡'도 진행 중이었다. 매년 두 자릿수 상승을 해오던 최저임금 인상을 동결하고 기업들에 보조금을 주는 등 주룽지 시절에 볼 수 있던 친기업정책을 내건 숨가쁜 구조작전이 펼쳐지고 있다.

광둥성 정부는 광저우~주하이 간 경전철 등에 2조3000억위안(460조원)을 쏟아붓기로 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내수를 진작시키겠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투자와 섬유 등 노동집약형 수출산업까지 지원을 다시 늘리기로 한 데서 산업구조 고도화를 내건 후 주석의 질적성장론이 위협받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를 두고 주룽지 노선의 부활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응급조치라는 게 중국 정부의 메시지다.

주룽지식 성장모델로의 회귀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기자가 광저우에 도착한 지난 20일 저녁 이곳 신문에는 선전의 강철업체인 화메이가 문을 닫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유는 환경오염 물질 배출.환경을 희생하면서 무조건적인 성장을 추구하던 과거로의 회귀는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둥관시도 마찬가지였다. 시정부 차원에서 10억위안(2000억원)의 긴급 구호자금을 마련,기업들에 지원하고 있지만 조건이 붙어 있었다. 첨단기술 업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부가가치 업체나 에너지 다소비 업체,환경오염 물질 배출 업체 등의 도태라는 원칙은 금융위기의 쓰나미 속에서도 지켜지고 있었다. 광저우 포스코 우형택 총경리는 이에 대해 "중국 경제가 금융위기로 인해 저속기어로 급히 바꿨지만 아직 핸들을 꺾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앞으로 실물경제가 더 나빠진다면 정책 방향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현재의 경기부양책으로는 중국에서 필요한 연간 2400만개의 신규 일자리가 만들어질지 의문"(박근희 중국삼성대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개혁의 실패는 용인돼도 개혁의 후퇴는 있을 수 없다"(왕양 광둥성 당서기)는 원칙이 경제위기의 쓰나미 속에서도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광둥성 광저우/둥관=조주현 특파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