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음대 건물 3층에 있는 임헌정 교수(55)의 연구실.그 곳은 임 교수만을 위한 사색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가 가르치는 작곡과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뤄 마치 동아리방에 들어온 듯했다. 수다를 떨거나 피아노를 치는 학생들로 왁자지껄했고,그 와중에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인 그가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단원들의 실력을 키운다는 소문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곧 이어 임 교수가 나타나 "연구실이 시끄러워 미안하다"며 학생들을 몰아냈다.

내년이면 그가 부천필에 몸담은 지 20년이 된다. 1985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해온 그는 1989년 부천시로부터 부천필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위촉됐다.

그가 취임한 이후 부천필은 공연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당시 단원들의 월급이 20만~30만원에 불과했지만 서울시향과 KBS오케스트라도 하기 힘든 유명 작곡가들의 전곡 시리즈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부천필은 1991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국내 최초로 말러교향곡 전곡을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월급을 많이 줄 수 없는 현실에서 단원들의 동기 부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적 자존심을 건드린 덕분이었습니다. 남이 시키는대로 하는 노예근성으로 살아갈 것이냐,자유인으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예술가의 길을 갈 것이냐 선택하라고 했죠."

단원들의 태도가 하나씩 바뀌기 시작했다. 잠깐 있다가 더 좋은 오케스트라로 떠날 줄 알았던 지휘자가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자 단원들의 신뢰도 점차 깊어졌다. 실제로 그는 객원 지휘자로 다른 교향악단의 포디엄(지휘석)에 선 적이 다섯 번도 안 된다. 상임지휘자로 스카우트하려는 곳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힘들게 붙잡은 단원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그의 고민은 이렇게 다져놓은 부천필을 '독립'시키는 것이다. '임헌정'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시스템과 자생력을 갖춘 부천필이 돼야 한다는 것.이를 위해 2005년부터 해마다 단원들이 수석지휘자를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단원들도 매년 블라인드 테스트 형식으로 오디션을 봐야 한다. 매월 받는 수당까지 일곱개 등급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내부에서 혁신하지 않으면 외부인들이 이 곳을 바꿔버릴 수 있다"며 "서울시향도 과거 그런 경험을 거쳐 지금의 실력에 이르렀기 때문에 부천필 단원들은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에 있을 취임 20주년 기념연주회에서는 베토벤과 브람스 교향곡을 재해석해 들려줄 계획입니다. 이후에는 다시 말러로 돌아갈 겁니다. 2010년,2011년이 각각 말러 탄생 150주년,서거 100주년이잖아요. "

약속한 인터뷰 시간이 지나자 그는 슬슬 연구실을 나갈 채비를 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30일에 있을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부천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이날 공연은 부천필이 지난해부터 해온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시리즈의 다섯번째 무대.교향곡 6번을 들려줄 예정이다. 1만~3만원.(032)320-3481

글 박신영 기자/사진 임대철 인턴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