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경제 넘어선 금융 과속이 위기 불러"

24일로 3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물러나는 유지창 은행연합회장은 "오해이든 과장이든 관계없이 은행권이 부정적 인식의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금융혁신과 자본시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은행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며 "이번 위기가 우리 금융산업이 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금융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의 금융위기를 보면서 탐욕,방만,모럴 해저드,금융공학 역기능이라는 단어와 함께 신용 가치 윤리라는 단어가 오버랩되면서 금융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금융의 머니 게임화와 실물.금융 간의 지나친 괴리 현상에 대해 우려해 왔습니다. 이번 위기는 10여년간의 저금리와 과잉 유동성이 맞물리면서 버블이 형성된 결과입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금융감독기구가 시장의 흐름에 휩싸이지 않고 깨어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실물과 금융 간의 관계를 보면 실물경제의 발전 속도를 넘어서는 급속한 금융 발전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무분별한 대출과 자산 버블이 발생하면 결국 거품이 빠지면서 부도가 나고 신용 경색으로 이어져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는 사례가 반복됩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외부 충격을 견뎌내고 지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물 쪽이 튼튼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을 자주 원용했는데,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실물과 금융의 관계 역시 이 말에 그 핵심이 녹아 있습니다. "

―이번 금융위기로 인해 전통적인 상업은행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행은 전통적으로 유동성 공급자로서 통화신용 정책의 중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금융경제 시스템이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작동하게 하는 필수 기관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자본시장의 발전으로 은행을 대체할 수 있는 기능이 창출되면서 금융에서 은행의 비중이 축소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은행은 여전히 지급결제 시스템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통화정책의 파급 경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에서 투자은행이 상업은행의 자금 중개 기능을 대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시장의 유동성은 순식간에 말라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인 예대구조를 가진 은행의 기능은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은행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사회 저변에 은행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국민들은 외견상 고급스런 사무실,높은 임금 수준,자금 공급자로서의 우월적 지위와 높은 수익에도 불구하고 기업 및 가계가 어려울 때 이를 외면하는 은행의 영업 행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과거 외환위기 때 은행들이 공적자금을 받아 갱생했다고 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은행들은 비교적 손쉬운 부동산담보대출 및 중소기업에 대한 쏠림 대출,무리한 외형 확대 경쟁 등으로 성숙하지 못한 영업 행태를 보인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또 고객의 입장에서는 은행의 막대한 이익이 예금자에게는 이자를 덜 주고 대출자에게는 비싼 이자를 물렸거나 수수료 수입을 많이 챙긴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해이든 과장이든 관계없이 우리 은행권은 이런 부정적인 인식 극복을 위해 적극적인 서비스 정신과 직업윤리,그리고 사회공헌 활동 등을 통해 고객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융 시스템의 중추로서 타 금융회사가 하기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은행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은행권도 글로벌 경제위기로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비롯한 수익성,건전성 등 경영지표들이 급격히 악화하고 해외 신용평가사들은 국내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낮추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은행은 자체 문제도 해결하고 실물부문의 어려움을 덜어주라는 사회적 기대에도 부응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은행은 증자 후순위채 발행 등 자기자본 확충과 안정적 차입선 확보,경영 합리화에 박차를 가해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고 기술력이 있거나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가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선제적으로 과감히 지원해 실물부문의 위축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

―산업은행 등 특수 은행의 민영화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공기업은 민영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것이 설립 당시의 기준으로만 보면 수긍할 수 있지만 설립 이후 시대에 따라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고 이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실례로 이번 경제위기 대처에서 상업은행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으며 이런 경우 국책은행들을 보다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민영화를 성급하게 해서 국가 정책적 수요가 생겼을 때 마땅히 이를 처리할 기구가 없거나 유사한 기구가 있더라도 규모가 작아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다면 다시 관치금융으로 돌아가는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금융부문의 위기가 실물부문으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는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긴밀한 공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파국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금융불안이 실물경제 위축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2~3%대로 하락할 전망이라고 하니 걱정입니다. 이미 중소기업 지원 확대,부동산 및 건설경기 활성화,감세 및 규제 완화 등 일련의 경기부양책들이 발표되었습니다. 한은도 예상을 뛰어넘는 큰 폭의 금리 인하를 단행해 시중 자금 경색을 완화하고 향후 경기 둔화에 대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추가적인 금리 인하와 신용보증 확대가 필요합니다. 사업성이 있는 기업이 유동성 부족으로 도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어쩌면 죄악인지도 모릅니다. 상업 금융회사에 무조건 여신 지원을 늘리라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업성이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보증기관의 보증 한도를 확충해 과감히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위기시에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불확실성으로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가 선도적으로 마중물 역할을 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한 조치는 과감히 신속히 충분히 해야 합니다. "

―최근 금융위기 대처 과정에서 한국은행에 대한 비판이 일부 있습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많이 신뢰하고 임직원의 우수성도 인정합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중앙은행이 많은 비난을 받아 안타깝습니다. 과거 관치금융 시절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통화신용 정책 기능을 크게 훼손시킨 경험이 있고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 등으로 폄하됐던 시절의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법률적으로 충분히 보장된 이후 너무 교과서적인 중앙은행의 역할만 강조하다 보니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은행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최근의 금융위기에서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위기 대응 모습을 보면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해 봅니다. "

―노사문제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기 바랍니다.

"금융위기를 맞아 임금 동결을 노조 측에 요구했습니다만 금년도 금융권 공동임단협을 마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아쉽습니다. 저는 매사에 시계추 원리가 있다고 봅니다. 노동조합에서는 과거의 피해의식으로 인해 아직도 한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중간에서 수렴이 되어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

―행정당국 후배들에게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소명의식을 가지고,적은 봉급으로도 열심히 일하고,퇴직 후의 보장은 별로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능한 인재가 공직에 근무하려 할까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기대와 책임을 물으면서 대우는 어떤 수준입니까. 공직은 성직이 아닙니다. 물론 공무원들도 맡겨진 소임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바르게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해관계인을 설득하고 업계를 리드할 실력도 갖춰야 합니다. 지금의 낮은 평가가 넉넉한 평가로 바뀌어 자부심을 갖고 공직생활을 할 날이 올 것임을 확신합니다. "

이심기/강은구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