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기성 한국노동연구원장이 한국노총에 불려가 간부들에게 사과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박 원장의 죄목은 노동계 입장에 정면 배치되는 친기업적 내용을 정부 정책세미나에서 발표키로 했다는 것.박 원장은 경제인문사회연구원 단체장들이 참여하는 이 세미나에서 기간제 고용기간 3년으로 연장,정규직 과보호조항 완화 등을 주장할 예정이었다. 비정규직법을 고쳐 고용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자는 취지의 내용으로 국가경제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국책연구기관장으로서 충분히 밝힐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노동계는 박 원장의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트집잡아 원장 자리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박 원장은 자신을 공격하는 거대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려 잘못을 빌었고 발제 내용을 폐기처분해야 했다. 뒤틀린 심기(?)를 하루라도 빨리 가라앉혀야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요즘 노동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노동행정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 당장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2년이 되는 내년 7월 비정규직의 대량 해직사태가 우려되지만 정부는 제대로 된 처방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련법을 손질해야 하나 노동계의 반발이 워낙 거세 개정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지난 2월 취임 이후 줄곧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해온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노동계의 퇴진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툭하면 장관퇴진을 주장하고 나서자 노동부 안팎에선 "노동계로부터 욕먹는 장관이 돼라"는 주문을 쏟아내고 있다. 사회적 자본이 빈약하고 고성불패(高聲不敗)가 지배하는 우리나라 노동운동 현실에서 노조간부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집단이기주의적이고 투쟁적 행태를 벌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노동운동이란 게 노동자 대중을 의식해야 하는 정치적 행위여서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게 된다. 이러한 풍토 때문인지 노동계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장관은 '나쁜 장관'이요,노조 비위를 맞추며 포퓰리즘적 정책을 펼치는 장관은 '좋은 장관'이란 평가를 내놓고 있다.

실제로 틈만 나면 노동운동을 비판한 '원칙 맨' 김대환 전 장관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측으로부터 퇴진 공격을 거세게 받았다. 김 장관과 감정싸움까지 벌인 이용득 전 한국노총 위원장은 노사정위원회를 탈퇴,노정대화도 외면할 정도였다. 반면 문민정부 시절 '무노동 부분임금'도입과 해고자 원직·복직 등 친노(親勞)정책을 추진한 이인제 장관은 산업현장을 혼란에 빠트려 기업인과 노동부 직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노동계로부터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권기홍,이상수 전 장관도 법과 원칙보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친노정책으로 노동계로부터 후한 점수를 얻었다. 이 때문에 노동부 직원들 사이에선 역대 장관의 정책능력을 평가할 때 노동계의 비판 강도를 잣대로 이용한다. 욕을 많이 먹을수록 유능한 장관으로 간주되듯이.

비정규직법 개정을 비롯 복수노조허용,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같은 민감한 이슈들이 법개정을 기다리고 있어 노동계와 정부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어떤 법안을 제시하더라도 노동계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노동행정의 수장인 노동장관은 어차피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다. 노동계 공격에 뚝심으로 버티는 맷집과 일관성있게 정책을 밀어붙이는 소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