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샘플 책에 나온 '23호 캘린더'로 500부 주문 들어왔습니다. "

"△△교회가 11월15일까지 '15호 모델'로 1000부 넣어 달라고 합니다. "

서울 신설동에 있는 진흥문화 본사는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영업관리부 직원 10여명은 두 손에 각기 다른 전화기를 들고 쏟아지는 달력 주문을 받고 있었다. 디자이너 20여명은 각 교회들이 주문한 전도 문구와 교회 이름 등을 달력에 새겨넣느라 정신없었다. 성수동 공장에는 최근 뽑은 임시직 인력을 포함해 모두 150여명이 지난 10월부터 하루 3교대로 5만부가량의 달력을 찍고 있다.

박경진 회장(68)은 "달력 수요가 몰리는 매년 10~12월마다 나타나는 익숙한 풍경"이라며 "일반 달력업체들은 경기 침체 탓에 올해 주문량이 예년의 절반 수준으로 격감했다고 울상이지만 우리는 경기 영향을 덜 받는 교회가 주거래처인 덕분에 그다지 주문량이 줄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만 진흥문화는 기독교 달력업계에서는 유명 기업이다. 한 해 800만부에 달하는 교회 달력 시장의 절반가량을 점유하고 있어서다. 출판 및 기독교 용품 사업 등을 합친 진흥문화의 연 매출은 100억원에 이른다.

진흥문화의 출발은 초라했다. 충남 서산에서 소작농 생활을 하던 박 회장이 서울로 상경한 때는 1969년."그 넓은 서울에 설마 밥벌이 할 일이 없겠느냐"는 생각에 이불보따리를 싸매고 난곡동 철거민촌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학력에 왼쪽 눈이 일그러진 채 태어난 박 회장이 번듯한 직장을 잡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막노동에서부터 쌀집 배달원,노점상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달력은 우연처럼 다가왔다. 한 중소 달력업체로부터 "달력을 팔아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온 것.1973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시작한 달력 영업은 아르바이트치곤 수입이 쏠쏠했다. 쌀 20가마(80㎏)를 살 수 있는 돈을 3개월 만에 벌었다.

그가 '달력 영업의 귀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전략과 타고난 성실함 덕분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 회장은 당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교회에 주목한 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뛰었다. 박 회장은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달력을 내놓자 교회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며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끝까지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더니 감동한 고객들이 새로운 고객을 소개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신감이 붙은 박 회장은 1976년 진흥문화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달력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교회 달력을 내놓는 업체들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사업은 정체 상태에 빠졌다. 남들과 다른 달력을 만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급기야 박 회장은 1983년 3월 3주일 일정으로 '유럽 11개국 교회·성당 투어'에 나섰다. 셋방살이를 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쪼들렸지만 '기독교의 본산인 유럽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야 남들과 다른 달력을 만들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귀국한 박 회장은 바티칸성당 등을 둘러보며 얻은 영감과 유럽에서 사 모은 기독교 그림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달력 제작에 도전했다. 예수의 모습과 날짜로만 구성된 기존 기독교 달력과는 달리 스토리가 있는 성화(聖畵)와 그 내용을 설명해주는 성경 구절을 함께 새겨넣은 것.'위대한 생애'란 이름을 붙인 이 달력은 그 해 53만부나 팔렸다. 박 회장은 "단일 모델로 50만부 이상 팔리는 달력은 지금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후로는 승승장구였다. 박 회장이 발로 뛰며 신뢰 관계를 구축한 교회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었기 때문이다. 진흥문화가 보유한 성화 그림과 사진 등 콘텐츠가 경쟁 업체보다 훨씬 풍부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고객이 된 교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94년 기업체용 달력 시장에 뛰어들면서 생산 부수는 더욱 늘어 2001년에는 640만부를 찍어내는 대형 달력업체가 됐다. 부평순복음교회 연세중앙교회 등 전국 2만여 교회가 속속 진흥문화의 고객이 됐다.

장남인 박형호 사장(40)이 합류한 것은 이 즈음이었다. 아버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MBA(경영학석사)를 마친 큰아들에게 "큰 회사에서 일해보라"고 권했지만,박 사장은 가업 승계를 택했다. 입사 2년 만인 2003년 대표이사에 취임한 박 사장은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출혈 경쟁이 벌어지던 기업체용 달력 사업을 2004년에 접고 기독교 달력에 집중했다. 생산부수가 200만부가량 줄면서 매출도 150억원에서 100억원 수준으로 추락했지만 수익성은 오히려 좋아졌다. 내친 김에 회계를 비롯한 낙후된 기업관리 시스템도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박 사장은 "2010년까지 내부 구조조정을 끝마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것"이라며 "아버지가 세운 기업을 더 크고 건실하게 키워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