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실내악을 연주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문장에 이르러,그 독주자는 집시의 바이올린을 낚아채고는 광기어린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악보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모든 것을 부술 듯이 큰 북을 두드려댄다. 형용사가 빗발치고 부사가 무더기로 쏟아져내린다. '

프랑스 작가 에릭 뇌오프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을 남긴 소설가 로맹 가리를 이렇게 평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 ≪자기 앞의 생≫으로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동일인이 두 번 수상하는 기록을 남기고,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한 배우 진 시버그와 사랑에 빠지는 등 다채롭게 삶을 편력하다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맹 가리.

그의 미완성작 등 단편 7편이 수록된 ≪마지막 숨결≫(문학동네)이 출간됐다. 1935년부터 1970년대까지 쓰여졌으며,작가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거나 미완성 상태로 남은 원고들이다.

<마지막 숨결>은 영어로 쓰인 미발표 원고.이 작품에서는 이름부터 이력까지 작가 본인과 흡사한 '나'가 등장한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양복 깃에 꽂은 레지옹 도뇌르 3등 훈장 수훈자의 약장(略章),이제는 시대 뒤편으로 밀려난 구닥다리같은 50대 프랑스인인 '나'는 시간을 '죽이며' 미국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관심을 드러내는 젊은 웨이트리스와 농을 주고받기도 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를 추억하기도 하지만,'나'의 관심은 곧 닥쳐올 죽음에 쏠려 있다. 이미 유능한 청부살인업자에게 이날 오후 4시에 자신을 고통없이 죽여달라고 부탁한 상태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에 뜻밖의 인물이 뛰어들며 긴장감을 비틀어버린다. 미완성작임에도 충분히 완성도를 갖췄다.

그가 21세 때 발표한 <폭풍우>에서 의사 부부는 남편에게 남성을 앗아가버리고 아내에게서는 사랑을 앗아가버릴 만큼 끔찍한 열대의 태양에 지쳐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기이하고도 음산한 남자는 아내를 온통 뒤흔들어버린다. 이 외에도 작가가 참가한 전쟁과 전우에 대해 언급하는 <인문지리>,미완성 원고 <그리스 사람> 등이 실렸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