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지르는 中 한국기업 … "야반도주할까 종업원들이 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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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금 2만위안(약 380만원)이 없어서 사채를 빌렸어요. 저도 어이가 없습니다. "
중국 칭다오 청양구에서 봉제사업을 하는 한국기업 A사장의 이야기다. 그의 전화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은행들이 대출창구를 막아버린 탓이다. 그는 "미국의 바이어들한테 전화가 오지 않을뿐더러 이미 수출한 물건의 대금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며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해 이리저리 돈을 빌리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칭다오 청양구는 한국 기업들이 많아 한국 상업지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한 사채업자들이 활기를 치고 다니는 사채거리가 돼버렸다"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 진출 한국 기업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칭다오에서만 올 들어 300곳이 문을 닫았다. 인건비 등 원가 상승에 수출 부진,그리고 자금난까지 겹치며 '3중고'를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대출을 중단한 게 결정타다. 대기업 그룹사인 금호렌트카.중국에서 렌터카 사업을 하는 이 회사는 최근 600만위안(약 11억4000만원)을 한국계 은행에서 대출받기로 하고 약정서까지 체결했지만 돈을 빌리지 못했다. 막상 자금을 인출하러 가니 본점에서 신규 대출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며 돈을 내주지 않았다. 대기업마저 이런 상황이니 중소기업이 돈을 빌리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은행들은 은행대로 죽을 맛이다. 위안화 예금을 받는 게 금지된 까닭에 그동안 중국 은행들로부터 자금을 차입해 영업하고 있지만,중국계 은행들이 금융위기 발생 후 대출을 회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싹싹 빌어서 단기자금을 구해 연명하고 있다"고 중국 진출 한 한국계 은행 관계자는 말했다.
칭다오보다 더 심각한 곳은 한국 수출기업이 몰려 있는 선전 둥관 등 광둥 지역이다. 선전 한인회 강희방 회장은 "이대로 간다면 연말까지 한국기업의 30%는 문을 닫을 것"이라고 밝혔다. "위안화 가치가 계속 올라 가격경쟁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미국과 유럽의 불경기로 수출길도 막혀 답답한 상황"이라며 "내수 전환을 하려고 해도 시장개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둥관에서 피혁사업을 하고 있는 김민혁 사장은 "어쩔수 없이 공장을 돌리긴 하지만 너무 힘들다"며 "종업원들이 혹시나 사장이 도망갈까봐 감시하고 있어 회사 분위기도 엉망진창"이라고 전했다. 둥관 지역에선 올 들어 중국 기업을 포함해 464개사가 파산했다.
KOTRA 칭다오 무역관 황재원 부관장은 "최근 기업들이 주로 자문을 구하는 것은 청산절차나 자산매각 혹은 운영자금 대출 등에 관련된 것"이라며 "신규 투자에 관한 문의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중국 정부가 저부가가치 산업을 퇴출시키는 산업 구조조정 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한국의 중소업체들이 피해를 봤는데 이젠 금융위기의 한파가 밀어닥치고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중국 내수 시장 진출이 꼭 필요한 만큼 한국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조주현 특파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