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경제를 위해 사인하시오"...美재무부, 9개 은행 부분 국유화 회의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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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재무부, 9개 은행 부분 국유화 회의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
14일 오전 8시40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재무부 건물 안 기자회견장.총 250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씨티그룹 JP모건체이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웰스파고 등 9개 주요 금융사를 부분 국유화키로 했다는 발표문을 읽는 헨리 폴슨 재무장관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몇 주 전까지 은행권에 대한 공적자금 직접 투입은 '파산의 시그널(신호)'로 비쳐질 수 있다며 반대했던 그였다.
시계바늘을 뒤로 돌린 13일 오후 3시 재무부 회의실.제이미 다이몬 JP모건체이스 회장을 비롯 미국 9개 선두은행의 최고경영자(CEO)들이 긴급 소집돼 회사 이름 알파벳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 앞엔 한 장의 문서가 놓여있었다. 정부가 은행의 우선주를 매입하며,임원 보수와 배당 정책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계약서였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나란히 앉은 폴슨 장관은 미 경제의 암울한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뉴욕FRB 총재인 티모시 가이스너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씨티그룹 250억달러,골드만삭스 100억달러 등 우선주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9개 은행에 1250억달러를 투입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회의장은 곧바로 소란스러워지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월가 최고의 협상가들을 위한 협상 절차는 없었다. 폴슨과 버냉키는 "조국을 위해,경제를 위해(for the country and the economy)"라는 말과 함께 서명을 하지 않으면 회의실을 나갈 수 없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오후 4시에 자리를 떴다. CEO들은 2시간30분가량을 고민하다가 오후 6시30분께 서류를 제출했다. 가장 나중에 서명한 이는 리처드 코바체비치 웰스파고 회장이었다.
재무부회의에서 3시간30분 동안 일어난 일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때 월가 동료였던 폴슨 장관과 암갈색 테이브를 마주하고 앉은 9명의 CEO 중 일부는 정부의 조건이 워런 버핏이 골드만삭스에 50억달러를 투자할 때 받아낸 조건보다 유리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코바체비치 회장은 "모기지(주택담보대출) 부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 구제금융을 받을 만큼 어렵지도 않은데 정부에 왜 우리 은행 지분을 넘겨야 하나"고 불만을 터트렸다. "정부 투자가 오히려 주주들에게 손해만 끼칠 것"이라는 점도 역설했다. 그는 거액의 퇴직보수(황금낙하산)를 포기해야 하는 데에도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코바체비치 회장은 와코비아 인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퇴직할 경우 보너스 4300만달러와 1억4000만달러어치의 주식과 스톡옵션을 받도록 돼 있다고 컨설팅회사인 제임스리다&어소시에이츠가 전했다.
케네스 루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회장도 "얼마 전 100억달러를 자체 조달했다"며 거부감을 보였다. 하지만 "임원보수를 제한하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정신없는 일"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씨티그룹의 비크람 판디트 회장,메릴린치의 존 테인 회장,다이몬 JP모건 회장 등은 "정부 보유 지분이 다른 우선주 주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재무부는 자본투입 대가로 일정 부분의 경영권을 요구할 것인가"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논의가 격렬해지자 폴슨 장관 옆자리에 있던 버냉키 FRB의장이 끼어 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질 필요는 없다"고 말을 꺼낸 그는 "이번 구제금융안은 은행이나 경제 전체에 모두 득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심지어 건전한 은행도 악화될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맥 모건스탠리 회장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 참석하기 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미쓰비시UFJ FG(파이낸셜그룹)로부터 90억달러를 유치했기 때문에 정부 자금이 필요없다고 했던 그였지만 9명의 CEO 중 제일 먼저 사인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는 폴슨 장관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판디트 씨티그룹 CEO가 공적자금을 받으면 더 유연한 자금 운용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하고,루이스 회장도 BOA의 영업 전망이 미국 경제와 직결돼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하면서 은행을 위해서도 공정한 거래라는 다이몬 JP모건 회장의 발언에 수긍하는 분위기가 됐다. 회의 막바지에 은행 대표들은 자사 이사진들과의 통화를 위해 재무부 건물 밖으로 나서거나 자신의 리무진 승용차를 찾아가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15일 '2500억달러 거래 뒤에 있는 드라마'라는 기사를 통해 회동을 전후한 뒷얘기를 이렇게 생생하게 전했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