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정유사 제품만 팔도록 하는 주유소의 '상표표시제(폴사인제)'를 폐지한 지 한 달이 흘렀다. 정부는 지난 9월1일 정유사 간 제품공급 경쟁을 유발시켜 가격을 끌어내리겠다는 취지로 복수 폴사인을 허용했지만 시장 반응은 싸늘하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4사 어디에도 폴사인 교체 의사를 밝혀온 주유소는 한 곳도 없다. 국제유가와 연동된 가격구조와 정유사에서 수십억원의 시설자금을 융자받는 주유소 업계 현실에 비춰 폴사인제 폐지는 출발부터 실패가 예견됐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생활물가 인하라는 '여론'을 의식한 듯한 유가정책은 더 있다. 수입업체를 통한 경쟁촉진을 명분으로 지난 4월 석유제품 수입관세를 1% 인하했지만 석유류 제품을 수입해 공급하는 업체는 한 곳도 없다. 국제가격과 내수가격이 엇비슷한 구조에서 운송비 등을 감안하면 관세인하에 따른 메리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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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유통 투명성을 높여 가격경쟁을 유도하겠다"며 정유사들의 주유소 공급가격을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10월부터는 주유소끼리 석유류 제품을 매매할 수 있는 수평거래도 허용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대해 정유업계는 "기업의 가장 중요한 경쟁 요소인 가격을 노출시켜 시장경제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정책"이라며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국내 석유류 제품 소비패턴을 보면 가격인상보다는 일시적인 가격인하 때 더 예민한 반응을 나타낸다. 최근 몇 년간 기름값이 올랐지만,석유류 제품 소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지난 6,7월 반짝 감소했던 에너지소비량은 국제 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한 지난 8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8월 국내 휘발유 소비량은 579만배럴로 7월에 비해 17.4%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ℓ당 몇십원을 낮추려는 정부의 유가 정책이 행정력의 낭비임을 방증하는 사례다. 정부는 여론을 의식한 기름값 낮추기에 연연하기보다 국가 전체 에너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에너지 로드맵'을 마련하는 데 신경써야 한다는 지적에 귀기울여야 할 때다.

손성태 산업부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