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원ㆍ달러 환율이 1100원 선을 웃돌면서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 거래를 한 수출 기업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기업들의 키코 관련 손실은 평가손을 합쳐 지난 6월 말 1조5000억원 수준에서 17일에는 2조3000억원 선으로 급증한 상태다. 이에 따라 환율 상승세가 계속된다면 태산LCD처럼 흑자 도산하는 중견 기업이 줄을 이을 것으로 우려된다.

금융감독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날 "수출업체들의 키코 관련 손실은 원ㆍ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1000억원가량 불어나는 것으로 잠정 추산된다"며 "키코 거래 잔액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감소할 전망이어서 올 연말까지 키코 거래 업체들의 고통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키코 거래 업체는 519개사며 계약 잔액(업체가 은행에 팔아야 할 콜옵션 금액 기준)은 101억달러다. 키코 거래 업체들은 원ㆍ달러 환율이 1046원이던 6월 말 현재 5103억원의 손실(실현손)을 기록했다. 환율이 이 수준에서 유지된다 해도 계약 종료 시까지 9678억원의 환차손(평가손)을 기록하게 되는 만큼 키코 손실은 1조4781억원에 이른다는 얘기다.

키코 계약은 지난해 대략 원ㆍ달러 환율 900∼950원 구간에서 집중적으로 맺어졌다. 키코는 구조상 원ㆍ달러 환율이 900원대 초ㆍ중반이라면 업체들이 환 헤징을 할 수 있지만,환율이 900원대 후반을 넘어서면 은행에 넘겨주기로 한 달러의 2∼3배를 900원대 초중반의 낮은 약정환율로 넘겨줘야 해 업체의 손실이 가파르게 증가한다.

비록 이날 원ㆍ달러 환율은 전일보다 44원 하락한 1116원을 기록했지만 금융업계에선 여전히 상승 기조에 있다고 보고 있다. 한 은행의 파생상품 담당자는 "17일의 환율을 기준으로 봤을 때 키코 거래 업체들의 손실은 2조3000억원에 육박한다"며 "이는 6월 말에 비해 7000억∼8000억원가량 증가한 수치"라고 말했다.

한편 태산LCD가 부도를 낸 뒤 키코 거래 수출 기업들은 △키코 상품 가입(계약) 원천 무효 △은행과 일괄 타결을 통한 중도 해지 △신용보증기금 등을 통한 키코 정산금액 지원 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키코 상품이 지극히 불공정한 구조로 설계돼 있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환율이 급등하면 가입 업체의 손실이 약정 금액의 2~3배에 이르고 중도 해지도 불가능하지만 정작 환율이 하락할 경우 은행과의 계약이 자동 해지돼 기업 측은 실제로 별다른 이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은행들이 이 같은 위험성을 사전에 충분히 고지하지 않은 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판매를 강요한 만큼 계약 자체가 무효라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130여 피해 기업들로 구성된 환 헤지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10월 중 신한 외환 씨티 SC제일은행 등을 상대로 키코 상품 계약무효를 위한 단체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정석현 위원장(수산중공업 회장)은 "수천만원만 빌려도 대표이사의 도장을 요구했던 은행들이 계약금액이 수십억원에 이르는 키코 상품에 대해서는 담당 실무부서장의 사인만으로도 상품을 판매했다"며 "키코 가입 업체에만 만기가 도래한 대출을 연장해 주는 등 상품 자체는 물론 판매과정에서도 불공정 소지가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박준동/이정선/김현석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