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한림대 의과대학 교수 kimha@medimail.co.kr>

무거운 얘기를 하기 전에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필자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힌트를 드려야겠다. 필자는 투표권을 가진 이후 다섯 번의 대통령선거를 경험했는데,그 중 두 번은 내가 뽑은 후보가 당선됐다. 그리고 나의 성향은 다섯 번의 선거기간에 바뀌지 않았다. 이쯤이면 눈치를 채셨는지….

10년 전 필자는 뜨거운 혈기로 <나는 미국이 싫다>란 책을 낸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최강국으로서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알고 있었는데,그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지금 해보려 한다.

미국은 안정적일 수 없는 사회구조를 가졌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의료보험이 없어 간단한 치료 하나 받으려고 임시이동진료소에서 새벽부터 줄을 서는 인구가 30%를 넘는다. 복지제도도 세계 최강국의 위상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미국 사회는 견고하다. 원칙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을 이루는 두 대들보가 국세청(IRS)과 연방대법원이다.

미국 국세청은 추상같다. 필자가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3년 후까지도 IRS는 세금 신고를 확인하는 우편물을 보냈다. 유명한 알 카포네를 감옥에 넣은 것은 경찰이 아니라 국세청이었다. 부자들이 돈을 어떻게 벌었든 세금은 제대로 낼 것이란 믿음 때문에 미국인은 부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갖지 않는다.

미국은 문화적 인종적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사회지만 엄정한 법치주의로 안정성을 유지한다. 맥도날드에서 커피에 손가락을 데었다고 고소장을 날리는 미국인들의 행위는 이런 법치주의의 극단적 예다. 법치주의의 정점에는 연방대법원이 있다. 연방대법원이 정치적 여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많은 경우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판결을 내려 왔다. 연방대법관들은 대통령이나 의회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고,미국 국민의 원칙을 만드는 가장 신뢰받는 집단이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6개월이 지났다. 5월 광우병 집회 때 나는 집회 참가자 중 현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다. 또 공약에 포함되지 않은 사안으로 집권 3개월차 대통령의 탄핵 여론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원칙이 있는 사회인지도 걱정됐다.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손가락을 분지르고 싶다"는 투의 무책임한 말,이제는 곤란하다. 대통령의 초기 실정은 상당 부분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혹시라도 분개해서 필자에게 메일을 보내실 분이 있다면 첫머리의 퀴즈를 먼저 풀어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