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의 '신냉전' 우려를 낳은 그루지야 사태는 지난 16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의 교전사태를 끝내기 위한 평화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BBC방송은 17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평화협정안을 마련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18일부터 러시아군이 철군을 시작할 것임을 약속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최근 타결된 미국과 폴란드 간 미사일방어(MD) 기지 협상이 자국을 겨냥한 것이라며 강력 비난하고 있고,이에 맞서 발틱함대 핵무장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미ㆍ러 간 긴장 관계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그루지야 사태가 궁극적으로는 옛 소련의 파워를 되살리고 싶어하는 러시아와 이를 경계하는 미국 간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군 18일부터 철군 시작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철군 약속은 평화협정 서명 후 하루 만에 나온 것이다. 앞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군이 평화협정에 따라 남오세티야 지역에서 조속히 완전 철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남오세티야 인근 고리지역에 있는 BBC 기자는 러시아가 여전히 그루지야를 동서로 관통하는 주요 도로와 마을을 통제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러시아 군인 수가 훨씬 줄었고 대신 구호물자를 수송하는 화물차들이 많이 지나다닌다고 전했다.

러시아-그루지야 사태는 지난 7일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이끄는 그루지야가 독립을 요구하는 남오세티야 자치주를 공습하면서 시작됐다. 친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야를 완전 점령하려던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시도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무산됐다. 러시아군이 그루지야의 휴전제의를 무시하고 수도 인근까지 진격하며 강공을 퍼붓자 러시아의 진짜 침공 목적은 눈엣가시인 그루지야의 친미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란 분석도 제기됐다.

실제 옛 소련권 국가들의 친미ㆍ친서방화는 그동안 러시아를 자극해왔다. 특히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추진해왔다. 서방 측이 지난 2월 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독립을 인정한 것이 그루지야 사태의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가 독립을 주장하는 남오세티야를 위해 군사작전을 펼친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사태 초기 가만히 있던 미국이 그루지야에 대한 지원에 나서면서 사태는 미국과 러시아의 충돌우려로까지 번졌다. 게다가 미국은 지난 14일 폴란드와 MD 기지 협상에 합의함으로써 러시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동안 미국은 이란 등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체코와 폴란드에 MD 기지 건설을 추진해왔으며,러시아는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강력 반발해왔다. 일단 러시아와 그루지야 양측 모두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러시아가 철군을 시작함에 따라 그루지야 사태는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조만간 평화협정안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러, 발틱함대 핵무장 검토 등 긴장여전


그루지야 사태는 일단락 됐지만 이번 사태로 표면화된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 관계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러시아는 미국의 유럽 MD체계 구축에 맞서 냉전 후 처음으로 발틱함대 핵탄두 무장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17일 모스크바의 한 고위군 소식통이 "유럽에 MD망을 설치하려는 미국의 결심에 맞서 군은 워싱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모든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신냉전' 시대가 시작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옛 소련 외무장관으로서 1980년대 후반 미국-소련 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했던 에드아루드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전 대통령(80)은 17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MD 체제에 집착하는 한 러시아는 지금 같은 강경조치를 계속 취할 것"이라며 "미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냉전 상황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때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의 그루지야 공격은 1939년 옛 소련의 핀란드 침공과 비슷하다"고 비난하면서 "러시아는 옛 소련 영토를 다시 복원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