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없습니다. 잘 봤어야 하는데... 요새는 반성문 쓰는 기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증권사 IT 담당 애널리스트의 자책이다. 올 초 증권사들이 반도체의 부활과 디스플레이 활황을 점치며 내놓은 IT주에 대한 핑크빛 전망은 이제 잿빛으로 변했다.

상반기만 해도 IT주는 고유가와 경기침체로 불안한 증시를 떠받치는 뚝심을 보여줬지만, 지난 5월을 고점으로 급격한 내리막을 타고 있다. 증권사들은 2분기 IT 업체들의 실적 발표를 기점으로 실적 전망과 목표주가를 줄줄이 내렸다.

◇ 다시 꺾인 D램, 곤두박질 LCD..3분기 적자 가능성도

수요에 대한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미국발 신용경색 위기 지속과 기름값 급등으로 인한 글로벌 소비 감소는 예상보다 심각했으며, 특히 경기에 민감한 IT업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IT의 침체는 깊고, 또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D램 가격은 성수기에 진입했는데도 이달 초 1.13달러로 오히려 하락세를 보이며 하반기 회복 전망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D램 가격 1달러선은 손익분기점으로 통한다. 물론 적자에 시달린 D램 업체들이 올해 설비투자를 크게 낮추는 등 감산에 나서고 있지만, 가격에 미치는 효과는 내년 하반기는 돼야할 것으로 예상된다.




LCD의 경우 더 심각하다. 최근 LG디스플레이를 비롯한 패널 업체들이 각각 10~15% 가량의 감산을 발표했는데도 가격은 폭락하고 있다. 이달 들어 주요 LCD 패널 가격이 전월 대비 최고 10% 가량 빠진 것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추정하기 힘들 정도로 급격히 패널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며 당혹해하고, LCD 업계는 "수십년만에 처음 겪는 상황"이라며 쇼크에 빠져 있다.

한 애널리스트는 "2분기 9000억원 가까운 영업이익을 올린 LG디스플레이가 3분기에는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이지만 애널리스트들이 적자 전망 내놓기를 주저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적자 전망이 나오면 주가는 일시적으로 더 빠질 것이란 얘기다.

◇ 올해 소비회복 난망..연말까지 답답할 듯

상반기 IT 수출의 1등공신이었던 휴대전화 역시 수출증가율이 6, 7월 연속 20%대에 머물며 지난 3월 47.5%에 비해 절반 이상 내려앉았다. 모토로라와 소니에릭슨은 지난 2분기 수천억원 규모의 적자를 낸 바 있다.

국내 업체들도 위기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지난달 25일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주우식 삼성전자 IR 담당 부사장은 "하반기에 계절적 성수기에 따른 수요 증대가 기대되지만 글로벌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에 따른 IT 부문의 수요 둔화 우려 또한 혼재하는 상황"이라며 "큰 폭의 이익개선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도 지난달 초 기자들과 만나 "미국 경기가 침체되자 삼성, 소니 등 LCD TV 메이커들이 저가 상품을 잇따라 내놓는 등 가격 경쟁에 들어갔고, 이에 발맞춰 CMO 등 대만 LCD 업체들이 덤핑 공세를 시작했다"며 "LCD 패널업체들의 수익구조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IT 부진의 타개책은 두말할 것 없이 글로벌 소비 회복이지만, 올해 안에 두드러진 변화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김성인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곡물값과 유가가 치솟고, 이머징마켓 등의 주식시장이 하락하면서 소비자들의 가처분소득이 줄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며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제일 먼저 줄이는게 IT 제품이므로 당분간은 수요 부진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또 "지난 4월께 중국 주식시장이 반토막났을 때 IT주 하락도 시작됐다는 점에서 중국 경제의 회복도 중요한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송종호 대우증권 애널리스트 역시 "내년 초까지는 조정 국면이 이어질 것"이라며 "물론 수요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지만 추세를 바꾸지는 못하는 제한적 회복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유가 안정에서 희망을 본다

그래도 기대를 걸만한 것은 최근 유가의 안정세다. 김장열 현대증권 애널리스트는 "유가가 안정되기만 하면 희망은 있다"며 "유가가 떨어지는 가운데 전통적으로 계절적 수요가 있는 9월께 국내 IT 업체들의 시장점유율 확대 등 경쟁력 지표가 양호하면 어느 정도 반등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유가 하락과 소비 회복에는 어느 정도 시차가 있지만, 주식시장에서는 기대가 선반영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성인 애널리스트 역시 "우리 IT 업체들의 경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며 환율도 굉장히 높아졌다"며 "투자의견을 다 내리고 나면 주가는 그 때가 바닥"이라고 말했다. 이어 품목별로는 원가 절감으로 수익성이 개선되고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반도체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IT주의 PBR(주가순자산비율)이 바닥권까지 떨어졌다는 점에서 추가 하락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남은 하반기동안 IT 업체와 투자자는 경기침체의 터널을 견디며 통과해야 할 상황이다. 초점은 세계 경제의 비상등이 언제 꺼지느냐다.

한경닷컴 박철응 기자 he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