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면 같이 웃고,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지난달 말 북한 금강산 자락의 한 식당에서 노래판이 벌어졌다.

작가 박범신씨와 독자들이 금강산 문학투어를 위해 서울을 떠나온 날 밤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까지 버스 안에서 시달린 차에 소주가 한잔씩 들어가자 자연스레 '노래자랑'이 이어졌다.

박씨는 차례가 돌아오자 "이 산의 봄도 이제 다 갔고,제 인생의 봄날도 갔으니 이 노래가 적당하겠다"며 백설희의 노래 '봄날은 간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잔잔하면서도 속 깊은 곳에서 끌어내는 가락이 듣는 이들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박씨는 문단에서 '청년 작가'로 불린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젊은 감수성과 치열한 자기 성찰 때문이다.

이미 1970~1980년대부터 베스트셀러 작가로 올라섰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박씨를 '청년'으로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다.

'청년 작가'는 그의 브랜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옥죄는 사슬이기도 하다.

아직도 마음 속에는 삶에 대한 '짐승과 같은 열정'이 살아 숨쉬는데 그의 인생은 어느덧 황혼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박씨가 히말라야를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런 삶의 이율배반,또는 슬픔을 극복하려는 것에서 비롯됐다.

삶의 유한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하던 중 극한상황 속에 있는 자신을 생각하게 된 것.그는 1991년 네팔을 소재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히말라야 앞에 섰다.

"8000~9000m에 이르는 설산 봉우리를 보고서는 숨이 탁 막혔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 이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것은 1994년.1~2년에 한 권씩 소설을 써낼 정도로 다산 작가였던 박씨가 1993년 절필 선언을 한 뒤 1년이 지나서였다.

"작품을 기계적으로 쏟아내고 있다는 매너리즘과 중년에 접어들면서 시간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본원적인 문제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절필했어요.

펜을 놓고 있던 그때 문득 히말라야가 생각났습니다."

태고의 모습이 남아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 시간의 문제,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치열하게 고민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떠났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를 열흘 동안 걷고 또 걸었어요.

처음 사흘 동안은 눈물이 날 정도로 무상히 지나가는 내 인생이 슬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정결해지더군요.

원시의 신비를 간직한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겸손히 인생의 순리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그때부터 박씨가 히말라야에 다녀온 횟수만 12번이다.

하지만 정상에 오른 적은 없다.

그에게 등산이 갖는 의미는 다른 이들과 판이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등산은 얼마나 많은 산의 정상에 오르느냐가 아니라,등산하는 동안 얼마나 깊숙이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일반인들도 올라갈 수 있는 트레킹 코스를 따라 그저 걷는다.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하는 것이다.

히말라야에 자주 가다 보니 얼굴을 익힌 산악인도 많아졌다.

그리고 가파른 빙벽에 자신의 생명을 내거는 산악인들의 도전 정신과 생명에 대한 초월적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산사나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을 치열하게 살아낼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그때 인연으로 산악인 엄홍길씨와 함께 킬리만자로 정상(2005년)과 동남아시아 최고봉 키나발루(2007년)를 오르기도 했다.

박씨가 1996년 다시 문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산과 산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다.

그는 얼마 전 산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촐라체'(푸른숲)를 출간했다.

'촐라체'는 어느 이복 형제가 촐라체 등반 과정에서 겪는 조난과 생환의 이야기.에베레스트 서남쪽 해발 6440m에 이르는 산인 촐라체를 실제 등정한 산악인 박정헌씨와 최강식씨의 경험담을 모티브로 삼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을 앞세운 안락함에 찌든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았다.

"습관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사는 삶을 내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이상을 향해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감수하는 도전적인 '야성'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눈물짓는 슬픔에 찬 세상을 떠나서

고독한 동굴을 네 아버지 집으로

정적을 네 낙원으로 만들라

사고(思考)를 다스리는 사고가 너의 기운찬 말이고

네 몸이 신들로 가득 찬 너의 사원이며

끊임없는 헌신이 너의 최선의 약이 되게 하라

/금강산을 오르며 박범신씨가 독자에게 전한

티베트 고승 밀라레파의 시 중에서

글=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사진=전형준 사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