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진료에 지친 나머지 일상 탈출을 늘 꿈꾸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대학병원 교수라면 점심을 굶어 가면서 환자를 봐야 하는 경우가 숱한 데다 연구와 후배 교육으로 몸이 축나기 십상이다.

그만큼 각자의 소망을 실현하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예외는 늘 있는 법.마치 딴 세상에서 사는 양 호모루덴스(Homo ludens·유희 인간)의 삶을 걷고 있는 정태섭 연세대 의대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교수(54)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의 명함에는 의사라는 자기 소개와 함께 '방사선 영상작가'(X-ray photo-artist)란 생소한 타이틀이 부기돼 있다.

그는 1997년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X-레이로 찍어 화제를 모은 이후 '방사선 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장르를 개척해왔다.

지난 1월에는 경기도 양평의 닥터박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사물을 X-레이로 찍어 컴퓨터 그래픽으로 형상을 재조합하고 채색을 해 사물의 감춰진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게 그가 지향하는 예술의 주제.

"X-레이를 강도를 달리해 여러 번 신체에 쪼이면 뼈뿐만 아니라 살갗도 같이 나오는 이른 바 '다중촬영법'을 고안했습니다.

기존 X-레이 아트는 뼈만 나와 흉물스러운 느낌만 줬지만 제 기법을 적용하면 생명감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초기엔 사람이 주된 소재였으나 요즘에는 방사선 노출을 우려해 꽃과 나무로 바꿨습니다."

정 교수는 촬영부터 포토샵 작업,인화까지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한다.

작업 과정 중 일부라도 남의 손을 빌리면 노하우가 쌓이지 않아서다.

"방사선 아트는 제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색깔이 다양하게 들어가고 디지털화시켜 수정 작업을 하고 여러 사진을 합성해 대형화한 것은 제가 길을 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미대를 나오지 않아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나름대로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했다고 자부합니다.

방사선 의학을 전공해서 얻은 지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니 저는 분명 혜택받은 사람이죠."

그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르네상스시대 미술 과학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자신의 우상으로 삼고 20여 가지나 되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해온 영향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주위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청계천에서 오래된 전축이나 망원경 같은 잡동사니를 사다가 해부하고 조립하는 게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 때문에 전자제품에 관한 한 기술자 못지 않게 해박하고 각양각색의 오래된 물건을 모으는 수집광이 돼 버렸다.

정 교수의 집과 연구실은 옛날 화폐와 우표,지도를 비롯해 100~200년 된 X-레이 튜브·현미경·망원경·사진기·과학슬라이드·원판사진,붓글씨나 펜으로 쓴 고서간지나 달걀 공예품 등으로 꽉 차 있다.

어쩌다 외국 출장을 가면 용무를 마친 뒤 취미용품을 사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화폐 수집은 1971년에 이미 수준급에 이르러 한 화폐 경매사에서는 은행장 기업인 등과 함께 당시 고교 2년생에 불과한 정 교수를 초대할 정도였다.

지금은 과학자 초상이 있는 화폐만 집중적으로 모아 특화하고 있다.

이런 호사스러운 취미생활을 할 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소년 정태섭은 세운상가에서 전축 부품을 2만~3만원에 사서 조립한 다음 5만원에 팔아 수익을 남겼다.

학창시절 조립해서 내다판 전축이 20대가 넘는다.

용접이나 측량 아르바이트도 했다.

이로 인해 공부할 시간은 다소 부족했지만 취미를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한 과학 수학 역사에 관한 지식은 의대를 들어가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됐다.

"제 취미는 방사선 아트와 수집 외에 시창(時唱),서예,천문관측,오디오·망원경 제작 등 20여 가지입니다.

다빈치가 잘했던 분야 중 딱 한 가지 따라가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건 요리입니다.

취미생활이 인생을 풍부하게 해줘요.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은 취미생활도 못하고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정 교수는 요즘 과학·문화 대중화를 위한 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1995년부터 매년 4월만 되면 병원 근처에 사는 수백명의 어린이들을 초청해 별보기 행사를 열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방사선 작품과 과학·문화 관련 골동품이 모아지면 개인 박물관을 세우거나 도서관에 기증해 대중과 공유할 계획도 갖고 있다.

글=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 사진=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