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제약업계의 관심은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집중됐다.

1년 가까이 끌던 고지혈증 치료제에 대한 약가 재평가 작업이 마무리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설마'하며 재평가 결과 자료를 받아든 제약사들은 이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심평원이 결정한 인하율은 22.6~35.9%.한 알에 1000원씩 쳐주던 약값을 640~780원으로 깎겠다는 것이었다.

눈 앞에서 순이익이 30%나 줄어들게 된 상황.그렇다고 심평원의 결정에 불복할 경우 해당 약이 건강보험 급여대상에서 제외돼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A제약사 관계자는 "고지혈증 치료제의 약가 인하는 시작에 불과하다"며 "고혈압치료제 등 대형 약물 가격도 30%씩 깎일 경우 버텨낼 수 있는 제약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국내에서 의약품을 제조ㆍ판매하는 업체는 대략 300여개.업계에서는 정부의 약가인하 정책이 본격화되면 이 중 절반 이상은 도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부의 전방위적인 약가 인하 압력을 견뎌낼 '체력'을 갖춘 회사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지난해 매출 100억원을 넘긴 제약사는 100개에도 못 미쳤고,국내 1위인 동아제약조차 6359억원에 그쳤다.

세계 최대 제약회사인 화이자의 지난해 매출(48조원)과는 비교가 안된다.

제약업계에 'M&A(인수ㆍ합병) 시나리오'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 파고를 극복하는 데 M&A만한 해법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M&A를 통해 덩치가 커지면 판매ㆍ관리비를 비롯한 상당한 비용을 아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약개발을 위한 R&D(연구ㆍ개발) 자금을 마련하기도 용이해진다.

복제약에 비해 '비싼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데다 해외 시장 개척도 노릴 수 있는 신약 개발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는 것.

실제 M&A 움직임은 업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SK케미칼과 삼양사 등 대기업은 물론 보령제약 등 중대형 제약사들은 공개적으로 "M&A를 하겠다"고 선언한 뒤 인수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몇몇 중견 제약사들과 구체적인 논의를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예 "우리 회사를 인수해달라"며 세일즈에 나선 중소 제약사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2위인 한미약품은 지난 3월 동아제약 지분을 추가 매입,지분율을 9.1%로 끌어올리며 '매출 1조원 제약기업 탄생'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약사들이 최근 들어 일반의약품 건강식품 의료기기 사업을 강화하는 것도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다.

대웅제약의 '우루사'처럼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은 건강보험 적용대상이 아닌 만큼 약제비 적정화 '폭풍'에서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중외제약이 염색약인 '창포엔'과 미용기기인 '예슬림'을 최근 선보이며 현재 5% 미만인 일반의약품 및 헬스케어 비중을 2010년까지 15%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로 한 게 대표적인 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약가 인하정책으로 촉발된 업계 구조조정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며 "3~4년 내에 수많은 M&A와 폐업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규모와 실력을 갖춘 몇몇 기업 위주로 제약업계가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