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 '이산' 전반엔 정순왕후 일파의 모함을 받은 세손이 그림 한 장을 찾아 결백을 입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림은 모처에서 역모중이었다는 세손 휘하 관원들이 같은 시간 궁궐 행사에 참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리를 장담하던 세력들은 이름까지 적힌 증거물에 할 말을 잃는다.

의궤(儀軌) 편찬용 기록화가 극중 세손을 살린 셈이다.

의궤란 조선조 국가ㆍ왕실의 주요 행사와 의식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왕비나 세자 책봉,상례와 제례,회갑연,궁궐 보수 등을 망라했는데 잔치에 쓰인 그릇같은 세세한 것까지 적은데다 알아보기 쉽게 도판을 곁들였다.

조선 왕조는 이처럼 기록의 왕조다.

의궤도 의궤요,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의 방대함과 정교함은 놀라움 그 자체다.

객관성을 위해 당대가 아닌 다음대에 편찬된 실록엔 국왕과 신하의 이력,국정 논의 과정은 물론 호구와 세금,민간 동향 등 국정 운영 및 사회 동향에 관한 온갖 정보가 수록됐다.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춘추관 시정기,승정원 일기 등을 기초자료로 삼았는데 사초 작성시 국왕도 함부로 간섭하거나 개입할 수 없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록은 임진왜란 전엔 서울 충주 성주 전주,임란 후엔 오대산 태백산 적성산 정족산으로 나눠 보관됐다.

편찬은 물론 보존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대통령 관련 기록을 비롯해 정부의 각종 자료를 보관ㆍ전시하는 '나라기록관'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은 선조들의 치열했던 기록정신을 돌아보게 해준다.

국가기록원이 경기 성남에 설립한 이 사고의 소장 자료는 총 400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국가 기록은 민족의 정신적 자산이자 미래의 정보자원이다.

기록은 과거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파악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든다.

거짓말을 하거나 시치미를 떼지 못하도록 하는 증거도 된다.

나라기록관의 개관을 계기로 정계 인사와 관료 모두 기록의 무서움과 엄정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으면 싶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