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등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59)는 작품 집필을 위한 취재 활동 도중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깊이 고찰할 기회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에게 반성(soul-searching)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8일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1995년의 도쿄 지하철 독가스 테러사건을 소재로 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의 집필을 위해 용의자들에 대한 재판 현장을 자주 찾았는데, 그를 통해 전쟁포로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며 이같이 밝혔다.

무라카미는 '싱가포르를 점령했던 일본 군인들이 잔인한 행동을 일삼았으나 전쟁이 끝나고 포로가 된 뒤에는 싱가포르 거리를 열심히 청소했다'고 회상한 리콴유(李光曜) 초대 싱가포르 총리의 칼럼 내용을 거론하며, 건실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잔인하게 돌변하는 현상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이지만 특히 일본인들에게 그런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때문에 독가스 테러 피해자들이나 일반인들을 만나면서 일본인들이 그런 위험한 세계에 빠져들지 않는 대신 열린 세상으로 나올 힘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알게 됐지만 그 힘의 원천인 하나로 모인 목소리가 전쟁으로 이끌려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소설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것인데 1990년대 중반에 일본의 거품 경제 구조가 무너지면서, 특히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실제로 그런 세상이 돼 버렸고 그로 인해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다는 견해를 보였다.

일본인들 또한 한동안 열심히 일하면 돈과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 환상이 무참히 깨졌다고 지적한 무라카미는 일본인들이 그로 인해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불편한 상태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야기(story)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것을 갖고 있는, 일종의 만국 공통어'라고 규정하고 창작 활동을 자신의 영혼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정의내린 무라카미는 "이야기야말로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혼란스러워하는 현대인들을 구제할 힘을 갖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야기가 만국 공통어 노릇을 할 수 있는 배경에 대해 무라카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의 언어와 환경, 철학이 다양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 안으로 침잠하게 되면 결국은 같은 세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이야기의 내용이 밝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울려나오는 뭔가를 찾아냄으로써 빠져들어간 어둠 속으로부터 구조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며 "나도 그런 이야기, 세상의 혼돈을 삼켜버리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그런 거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심각한 골초였으나 1982년 담배를 끊었고, 지금은 초저녁에 취침해 오전 2시 정도에 일어난 뒤 5∼6시간동안 창작 활동을 한다고 밝힌 무라카미는 "30대때 썼던 것과 같은 소설을 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며 자신이 써내고 싶어하는 '거대한 소설'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초창기의 1인칭 시점이 아닌) 3인칭 시점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나이를 먹은 뒤에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무라카미는 현재 집필중인 소설의 분량이나 인칭 형식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새 소설이 '두려움'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smi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