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에서 상인으로,이념과 정치에서 경제의 시대로! 일본 에도 시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문구다.

일본 지식인 사이에서 에도 시대(1603~1868)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그동안 서양을 '열심히 베껴' 경제대국이 됐지만 거품경제 붕괴 이후 서양모델을 대신할 새로운 방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거상들의 시대'(와키모토 유이치 지음,강신규 옮김,한스미디어)는 에도 시대 기업인들의 벤처정신과 비즈니스 시스템을 지금 벤치마킹하라고 권하는 책이다.저자는 일본경제신문 기자.

그는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 '도지마 쌀시장' 개장,통일화폐 발행을 통한 시장경제 발달,어음을 매개로 한 신용경제 성립,운하 건설과 해운.수상교통 발달 등을 깊숙히 취재하고 재구성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창건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권을 일왕에게 돌려주기까지 약 300년에 걸친 시기.우리로 치면 조선 선조 36년부터 고종 5년까지에 해당한다.18세기 당시 에도(도쿄)는 인구 100만명이 넘는 거대 도시였다.런던은 86만,파리 54만,베이징 50만,한양이 30만명이었다.이때 상인들은 쌀을 매개로 한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를 운영(1730년)했고 지금의 은행에 해당하는 환금융을 시작했다.

리스크를 무릅쓰고 운하를 굴착했으며 뉴타운을 조성했다.해운시대의 막을 열었던 벤처비즈니스를 시작했고 전국 규모의 상품경제와 소비경제를 확립했다.

저자는 '사무라이 때문에 '정치시대'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실물경제 시스템뿐만 아니라 신기전 개간,해운과 수상교통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민간의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빛난 민간 활력의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그 번영의 원동력은 강렬한 벤처정신을 가진 상인들이었다.막부는 경제활동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민간이 알아서 하라'며 시장경제를 지지했다.해운정책과 금융정책에서도 큰 줄기만 정할 뿐 운용은 민간에 맡겼다.그래서 상인들이 규칙을 정하고 스스로 운영한 '상인조합'이 발전할 수 있었고 3대 거상인 고노이케,미쓰이,스미토모도 각각 금융.상업.산업자본의 주체로 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책에는 오사카 제일의 거상 요도야,전국에 '작은 교토'를 만든 오우미 상인,해운물류혁명의 가와무라 즈이켄,환전상금융의 고우노이케 무네토시 등 거상들의 발자취와 그 속에 숨겨진 에피소드들도 담겨 있다.392쪽,1만8000원.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