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취임특집-VCR] 이명박, 대한민국 성공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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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명박 당선인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할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샐러리맨 전설을 넘어 마침내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를 이룬 이명박 당선인이 누구인지 정리해봤습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가난한 목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명박 대통령.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친을 도와 김밥과 풀빵, 과일, 생선 등을 팔며 생활전선에 나섰습니다.
스스로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가난과 도전'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사회에 입문하기 까지 혹독한 가난이 따라다녔습니다.
"길거리에서 장사를 했다..창피했지만 어머니께서 부끄러워하지 마라..당당하라..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학비는 없었지만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를 다닐 때 3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으며 고려대 상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환경미화원 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이어가던 대학생활도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상과대 학생회장 시절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을 했습니다.
옥살이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려워지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결국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건설에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현대 재직 시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많은 일화들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태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갔을 때 현지 강도들의 습격에 굴하지 않고 금고를 끝까지 지켜내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일화는 고 정주명 회장에게 바로 보고됐고 태국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입사한 지 2년만에 대리로 승진했고 29세에는 이사를, 35세에는 사장을 거쳐 46세에는 회장에 오릅니다.
"국내에서 사무자동화되는 것을 다 봐야한다..럭키빌딩이 최신화 된 것..이런 것을 급진적으로 추진했으면 좋겠다"
이 때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이름 뒤에는 '샐러리맨 신화'라는 호칭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불도저'식 스타일로 중동과 동남아시아를 누비며 끊임없는 도전을 벌였고 특유의 추진력과 뚝심은 현대가에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 대통령이 회사를 떠날 당시 현대는 임직원 17만명의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27년간의 현대그룹 생활을 마친 이 대통령은 정치에서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며 1992년 전국구 공천을 통해 정계에 입문합니다.
하지만 기업인 출신에게 정치판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95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실패한 뒤 96년 15대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끝나지 않아 의원 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2002년 민선 3기 시장으로 서울시청에 입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서울시민의 복리 정진, 지역사회 발전과 국가시책의 균형을 위해서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직책을 충실하겠다"
바로 이 때가 대권도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시점입니다.
서울시장 시절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굵직한 사업을 일구며 지도자로서의 강한 인상을 심기 시작합니다.
청계천 복원공사와 버스 전용차로, 서울숲 조성 등은 역대 시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대표적인 사업 가운데 첫 손에 꼽히는 것은 바로 청계천 복원공사 입니다.
"청계천이 열리면 서울이 살고 서울이 살면 나라가 사는것처럼 청계천 복원이 큰 기여가 되기를 바란다"
서울시장에 취임을 하자마자 작업에 착수해 불과 1년후인 2003년에 청계고가도로를 완전히 철거하고 2년3개월동안 복원공사를 벌입니다.
이 과정에서 노점상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4000회에 걸친 길고 험난한 협상 끝에 20만명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5.8킬로미터에 달하는 청계천의 물길은 휴식공간과 관광명소는 물론 생태자원의 보고로 탈바꿈 해 시민의 품으로 안기게 됩니다.
이때 이명박 대통령의 꼬리표에는 샐러리맨 신화에 이어 청계천 신화까지 붙게 됩니다.
4년간의 서울시장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 대통령은 새로운 미래 동력을 찾아 국내외 첨단산업 탐사에 나섭니다.
"한국기업이 들어가서 할 것 없나 이것만 생각..경제가 어려우니깐 중소기업 고부가가치나 하이테크 분야에서 많이 참여할 기회가 있지 않겠나 싶다"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내세우며 폭넓은 지지를 받기 시작해 결국 여론 지지율 1위 후보로 올라섰습니다.
"우리사회가 너무 정치논리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져..빨리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로 가야..그렇게 하면서 국민이 다 잘살게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청와대로 향하는 길은 그동안 걸어온 인생역정 만큼이나 험했습니다.
당 안팎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검증공세에 시달리며 어느 때보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다른 정치인들에 앞서 '경제'라는 구호를 정치 모토로 선점했고 무엇보다 경제살리기는 이명박이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합니다.
결국 국민들의 이목을 붙잡은 이명박 대통령은 1년2개월에 걸친 지독한 경선전을 치르고 힘겹게 대권의 첫 관문을 통과합니다.
"온몸을 던져서 12월19일을 향해 나가겠다..저의 결의는 어느 누구도 꺾지 못할 것..여러분이 기대하고 바라고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러나 도곡동 땅 차명재산 의혹에 이어 온 나라를 뒤흔든 BBK사건의 중심에 서며 또 다시 도덕성에 대한 검증을 받기 시작합니다.
도덕성 시비를 놓고 정치권에서 공방을 벌이고 비난 여론도 들끓었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지키는 데 성공합니다.
"낡은 것은 쓸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의미가 있다..국민에게 낮은 자세로 다가가서 국민에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받드는 자세로 찾아가겠다..새로운 시대를 열어서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의 강한 지지를 등에 업고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에 선출됐습니다.
가난을 딪고 일어서 샐러리맨 신화를 넘어 대한민국 신화를 이룬 이명박 대통령.
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지 국민들은 묵묵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준호기자 jhlee2@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