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을 대동한 일본인은 계좌 개설 사양.' 홍콩의 HSBC은행 본점은 작년 여름부터 창구에 이런 안내문을 써붙였다.

일본인 단체 관광객 수십 명이 계좌를 개설하겠다며 한꺼번에 몰려 창구 업무를 한 시간 이상 지연시킨 사태가 발생한 다음부터다.

일본인들 사이에 엔캐리 트레이드(싼 엔화를 팔아 고수익 외화자산에 투자하는 것) 열풍이 불면서 생겨난 해프닝이다.

금융 자산만 1500조엔을 가진 일본 개인들의 해외 투자는 남녀노소 불문이다.

일반 주부들이 외환 투자에 나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와타나베 부인'이란 큰손이 된 지는 오래다.

지난해부터 정년 퇴직을 맞은 단카이(團塊.베이비 붐) 세대의 노후 자금 굴리기로는 해외 펀드가 단연 최고 인기다.

도쿄대에 '외환투자 동호회'가 생겼을 정도로 대학생들에게도 해외 투자는 필수 과목이 됐다.

일본 언론은 돈을 싸들고 나가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리는 일본인들을 '머니 난민'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왜 제2경제대국 일본을 버리고 외국에만 투자하는 것일까.

최근 만난 경제 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일본 경제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는 2002년 이후 회복세를 타고 있다고 하지만 실질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5~2.0%로 낮은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금리를 올리기도 어려워 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연 0.5%도 안 된다.

성장도 수출 주도이지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다.

저출산 고령화로 노동 인구가 줄고 시장은 오그라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들에게 꿈과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회보험청에 돈을 맡기느니 베트남에 투자하는 게 더 안심된다." 지난해 정부의 연금 기록 부실에 실망해 여윳돈 3000만엔(약 2억5000만원)을 모두 신흥국 주식 펀드에 투자했다는 전 공무원 아라키 시게루씨(79)의 말이다.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의 저출산 고령화에 저성장 국면을 목전에 두고 있는 한국.앞날에 대한 비전마저 없다면 외국인 투자자뿐 아니라 국민들도 모국을 외면한다는 냉정한 사실이야말로 일본의 엔캐리 트레이드 열풍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점이란 생각이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