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이 12월1일 취임 20주년을 맞는다.

1987년 45세의 나이로 삼성그룹 경영을 맡은 지 스무해 동안 이 회장은 삼성을 '국내 기업'에서 일약 '글로벌 톱 컴퍼니'로 키워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삼성은 반도체와 LCD패널 휴대폰 등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서면서 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과를 인정한 일본 경제계는 이 회장을 '경영의 신'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올해 삼성그룹에서 이 회장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축배'는 보이지 않는다.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의혹 제기,정치권의 특검 도입 등 외부의 '암초'에 부딪히면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달 5일로 예정됐던 취임 20주년 기념행사도 취소됐다.

삼성 관계자는 "지금 제기되는 의혹과는 별개로 이 회장이 삼성을 성장시켜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공로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는데,그럴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실 이 회장이 일궈낸 지난 20년간의 경영 성과는 세계의 경쟁업체들과 전문가들도 놀라움을 표시할 정도다.

이 회장은 20년간 끊임없이 과거의 성공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승부사의 기질로 삼성의 성장을 이뤄냈다.

삼성그룹의 지난 20년간 성적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회장 취임 당시 17조원이었던 삼성그룹 매출은 지난해 152조원으로 8.9배로 늘었으며 수출 규모도 9억달러에서 663억달러로 무려 73.7배로 증가했다.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도 169억달러로 일본 소니 등을 제치고 세계 21위로 껑충 뛰었다.

이 같은 삼성의 성장은 고스란히 국가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삼성그룹 전체 매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8%,수출은 전체 수출의 21%를 차지했다.

국내 다른 기업들과 사회에 미친 영향도 컸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신(新)경영 선언(1993년),'21세기에는 한명의 천재가 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천재경영론(1994년),'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창조경영론(2006년) 등 이 회장이 제시한 화두는 위기 때마다 한국 경제의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경제계와 학계는 이런 이유에서 비자금 의혹사건의 여파로 이 회장의 취임 20주년까지 취소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이 회장이 20년간 국가 경제에 기여한 공(功)은 평가받지 못하고 제기된 의혹만 부각되고 있어서다.

이승철 전경련 전무는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들은 지난 수십년간 월드컵 4강이나 올림픽 금메달에 비할 수 없는 경제적 기여를 했는데,한 개인의 폭로로 과거의 공이 무시되고 있다"며 "삼성 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의 경영 위축도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재계 전체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도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한국 기업의 위상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이 회장의 20년 경영 성과는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효종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우리 경제가 빠른 시간안에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주된 견인차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었다"며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빛과 그림자란 두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삼성을 둘러싼 지금 상황은 그림자만 지적하고 성취는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외풍'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란 게 삼성의 고민이다.

취임 20주년을 맞이한 이 회장도 최근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룹 고위 임원들이 20주년 기념행사 취소를 건의하자 이 회장은 "알겠다"고만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룹 관계자는 "취임 20주년 기념행사가 취소된 것에 대해 이 회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며 "오히려 이 회장은 내년 이후 삼성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