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4년 전 미대에 편입할 때 '환갑 노인네가 무슨 그림이냐'며 쏘아붙이던 집사람도 이제는 '그 때 정말 잘 선택했다'며 자랑스러워합니다."

1995년부터 7년간 금호건설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한 이서형 전 사장(63)이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트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 전시회를 연 것.대기업 CEO가 은퇴 후 정규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개인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전 사장이 화가를 '제2의 인생'으로 선택한 때는 2002년.20여년간 몸 담았던 금호건설을 떠나면서 곧바로 미대 편입학을 준비한 것.아내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만류했지만 "한 학기 학비 버리는 셈치고 도전해보겠다"는 이 전 사장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결국 이 전 사장은 자식뻘 '동기'들이 있는 용인대 회화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고,내년 2월에는 석사모까지 쓴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8세 때 아버님을 여읜 탓에 돈 많이 드는 '화가의 길'은 포기해야 했어요.

대학(서울대 건축학과)을 졸업한 뒤론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직장생활 탓에 그림 그릴 엄두도 못냈고….직장에서 은퇴하고 나니 '어린시절 꿈'이 다시금 떠오르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느덧 여기까지 달려왔네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다는 게 말처럼 쉬웠을까.

이 전 사장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젊은 친구들에 비해 느린 '손'과 떨어지는 '순발력'은 단점이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나만의 철학은 '늦깎이 미술인'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며 "이런 이유로 '그림은 50세가 넘어서 시작하라'는 중국의 옛말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제2의 인생'을 걸은 4년여간 읽은 독서량이 30여년 직장생활 때보다 많다"며 "오랜 사회생활과 기업을 이끌던 경험도 그림을 그리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술인이 되면서 그의 관심을 끈 주제는 바로 '기(氣)'였다.

우리 일상에서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주제지만,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사례는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전시회에 실린 29점의 작품 주제 역시 모두 '기'로 요약된다.

전시회에 참석한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는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프로의 세계에 들어온 듯하다"며 극찬했고,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그림을 보면서 기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전 사장의 다음 목표는 미국 유학이다.

이미 몇몇 아트홀 등에 지원서를 낸 상태.입주작가로 들어가 전 세계의 미술인과 함께 공부하면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추상화의 대가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저의 '우상'입니다.

이제 막 입문한 미술인인 만큼 '칸딘스키를 따라잡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운 건 아니에요.

다만 그의 미술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미술인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물론 저만의 그림은 힘 닿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이 전 사장의 개인전은 12월4일까지 계속된다.

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