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담합을 하면 규제당국의 처벌을 받는다.

만약 규제당국들이 담합을 하면 이것은 누가 처벌하고 깨뜨려야 하는 것인가?

얼마 전 공정위와 금융감독당국이 금융회사에 대한 중복규제 방지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불공정 행위를 조사하기 전 상대기관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조사가 진행 중이면 한쪽은 조사절차를 중지한다는 얘기다.

이것만 보면 좋은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MOU에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상대기관의 제재가 충분치 않으면 추가적으로 조치할 수 있다고 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금융감독당국의 행정지도에 대해 금융회사가 개별적으로 행한 행위는 봐주겠지만,다른 업체와 합의해 공동으로 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공정위가 제재하겠다는 것이다.

행정지도의 위력을 모를 리 없는 이들 규제기관이 금융회사들이 개별적으로 행한 것과 공동으로 행한 것을 구분하겠다는 것은 코미디나 다름없다.

결국 공정위는 금융 쪽으로 영역을 확장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고,금융감독당국은 행정지도 등 기존의 규제권한을 보장받은 셈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MOU가 아니라 규제당국 간 담합이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중복 규제가 해소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토대가 더욱 강화됐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통신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정통부는 경쟁을 촉진해 이동통신 요금을 인하하겠다며 설비를 빌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소위 재판매시장 활성화를 위한 전기통신법 개정안을 내놨었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경쟁촉진이 아니라 오히려 규제강화로 나타났다.

요금인가제는 사실상 유지하고,재판매시장에 대해선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시장점유율 제한,재판매가 요율 결정 등 이런저런 규제로 자신들의 권한만 잔뜩 키워 놓았던 것이다.

당연히 시장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공정위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정통부는 늦어도 3년 뒤에는 요금인가제를 신고제로 바꾸고 시장점유율 상한선을 철폐한다는 등의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공정위는 통신분야로 영역을 더욱 확장할 근거를 구축했고,정통부는 크게 손해본 것 없이 기득권을 유지한 것이다.

요금인가제가 신고제로 바뀐다고 해도 정통부가 마음만 먹으면 신고제도 얼마든지 인가제처럼 운영할 수 있다.

게다가 각종 인허가권,행정지도 등 사업자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들이 천지에 깔려 있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금감위ㆍ금감원,정통부ㆍ통신위,방송위 등 전문 규제당국과 경쟁당국(공정위)의 중첩적 규제권한 행사는 앞으로 더 심해질 공산이 크다.

공정위는 조직을 기능위주에서 산업별로 개편하면서 금융 통신 방송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고,전문 규제당국들은 이에 맞서 소관 분야의 특수성,공익성을 내세워 규제권한 유지에 안간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마다 다양한 형태의 경쟁당국과 전문 규제당국들이 있지만 추구하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규제비용 최소화,규제의 일관성 유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규제산업을 계속 규제산업으로만 인식해서는 경쟁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규제기구의 대개편,대혁신이 절실하다.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