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진 이후 10년 동안의 경제지표 변화를 살펴보면 유달리 뒤처지는 항목이 눈에 띈다.

설비투자 부진이 바로 그것이다.

실질가격 기준으로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1996년에 비해 수출이 세 배 이상 늘어났고 정부지출(57%)과 민간소비(30%)도 증가했지만 유독 설비투자만큼은 8.8% 늘어나는 데 그쳤다.

외환위기 이전에 비해 경제 규모가 50% 이상 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뒷걸음질친 셈이다.

설비투자 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기관들이 다양한 분석자료들을 내놓았다.

△선단식 경영과 경제력 집중에 대한 정부의 규제 강화 △모험적 투자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견제 기능이 강화된 기업지배구조와 증권 제도 △은행들의 기업대출 몸사리기 △단기 이익을 중시하는 주식시장의 풍토 등 다양한 요인들이 기업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저해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지적들이다.

때만 되면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정치권의 구태도 기업인들의 의욕을 꺾는 요인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기업의 재무 안정성을 강화하도록 은행들이 압박하고 사업다각화에 대해서는 정부가 문어발이라고 규제하다보니 기업가정신이 위축됐다"며 "기업가정신은 야생 상태에서 제대로 발휘되는데 외환위기 이후 야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금융팀장도 "외환위기 이후 위험을 떠안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기업들은 수비 경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한국 기업들의 최대 장점인 역동성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외환위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공격적인 기업경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그러다보니 기업들 스스로 위험을 회피하는 보수적 경영에 몰두하게 됐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 그룹들은 주력 업종이 아닌 기업을 팔고 자산을 포기해야 했던 '빅딜'정책의 후유증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 방향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문제다.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2004년 2월~2005년 3월)은 취임 초 기업가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기업보국(起業報國)'이라는 휘호를 집무실에 걸어놓고 창업형 기업에 대해서는 각종 세제 혜택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전 부총리는 그의 친기업적 태도 때문에 청와대의 젊은 비서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비정규직보호법과 수도권 집중 규제,분양원가공개와 이자제한 등 시장 원칙에 어긋나는 규제들이 쏟아져나와 정책의 불확실성을 키웠다.

그 결과 한국 산업구조의 역동성은 외환위기 이후 사라져버렸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인 1996년 한국의 3대 수출품목은 반도체 자동차 선박(해양구조물 포함)이었는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6년 3대 수출품목도 반도체 자동차 선박이다.

1~3위 품목의 순서도 바뀌지 않았다.

3저 호황기의 정점이었던 1988년 수출 3대 품목(의류 신발 TV)이 10년 뒤 상위권에서 모두 사라질 만큼 혁신을 거듭했던 과거 산업계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다행히 주변 여건이 좋아 우리 경제는 큰 어려움 없이 지난 10년을 지낼 수 있었다.

△장기간의 저금리 △수출을 늘리기 위해 오랫동안 지속해온 높은 원화환율 △중국과 인도 중남미 등 신흥시장국들의 폭발적인 수요 등에 힘입어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내 기업들의 경영 여건은 이미 나빠지기 시작했다.

금리가 상당히 올랐고 환율도 1달러당 900원 선을 위협받고 있다.

저금리와 환율 방어 덕분에 2004년 7%대로 높아졌던 국내기업의 경상이익률은 지난해 5%대로 떨어진 상태다.

미국 경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약(弱)달러로 흔들리고 있으며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보고 있다.

중국과 인도 등이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는 상황에서 10년 전 산업구조로 국제경쟁력을 앞으로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일부 국내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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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가정신이란 ]

기업가(entrepreneur)는 '시도하다''모험하다'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entreprendre'에서 유래됐다.

18세기 프랑스 경제학자인 칸틸리옹이 '불확실성과 위험수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사람'을 지칭하면서부터 이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위험과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정신'으로 창조적인 기업혁신이 중요해진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