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의 '샤토 탈보(Chateau Talbot)'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 당시 영국령이었던 보르도를 사수한 영국의 탈보트 장군을 기념해 만든 이 와인을 프랑스,미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왜 그럴까? 답을 알려면 한국 기내(機內) 와인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샤토 탈보'는 대한항공이 1980년부터 1988년까지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공한 와인이었다.

방진식 대한항공 와인서비스 담당 차장은 "1987년 10월 와인 수입이 자유화된 직후 한 수입상이 대한항공의 기내 와인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 수입을 시작했고,예상이 적중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38년 한국 기내 와인의 역사

국내 항공사가 와인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대한항공이 첫 출항하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값이 너무 비싸 일반인은 접근이 어려웠던 시절,항공기는 면세 구역인 까닭에 각종 와인들을 낮은 가격에 구입해 자유롭게 제공할 수 있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와인 1세대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해외로 가는 항공기 안에서 와인을 처음 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4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고 와인이 대중화되면서 기내 와인의 소비량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소비한 와인은 총 107만병에 달한다.

성장 속도도 빠르다.

아시아나항공의 기내 와인 소비량은 2005년 31만병에서 작년 35만병,올해(10월 누계) 46만병으로 급증했다.

맥주와 비교해봐도 이 같은 성장세를 실감할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비행기에서 올 10월까지 제공된 맥주는 총 194만캔.와인 한병의 용량(700㎖)이 맥주(355㎖)의 두 배이므로 동일 단위로 환산하면 와인 소비량은 맥주의 절반에 육박한다.

◆기내 와인 '안 마시면 손해'

방 차장은 "어떤 와인을 제공하느냐가 항공사의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에 양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기내 와인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보통 6개월∼1년 단위로 기내 와인의 종류가 변경될 때마다 엄격한 심사가 이뤄진다.

대한항공은 조양호 회장의 딸인 조현아 기내식사업본부장(상무) 등이 진두 지휘,임원 및 2명의 외국인(프랑스,독일) 기내식 조리장 등 8명 안팎으로 구성된 와인 선정 위원회가 기내 와인 리스트를 작성한다.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세계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를 초빙해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라벨을 가리고 하는 시음)까지 진행했다.

이 같은 이유로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제공되는 기내 와인이라 해도 어지간한 특급호텔의 하우스 와인(잔으로 파는 와인)보다 품질이 훨씬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보통 이코노미 클래스엔 소비자 판매가 기준으로 2만∼4만원 수준의 와인이 제공되고,퍼스트 클래스는 10만∼20만원,비즈니스 클래스엔 7만∼10만원의 와인을 맛 볼 수 있다.

비즈니스에 탄 탑승객은 한 잔(100㎖ 기준)에 1만원짜리 와인을 마신다는 얘기다.

기내 와인의 품질이 좋은 것은 철저한 선정 과정뿐만 아니라 항공기가 면세 구역이라는 점도 큰몫을 하고 있다.

수입사가 와인 제조업체로부터 1만원에 와인을 사 왔다면 60%가량인 6213원이 세금인데 항공사는 이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각 단계별 유통 마진도 안 붙기 때문에 국내 유통 시장에서 판매되는 가격과 비교하면 항공사들은 헐값에 사오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대한항공 등 대부분의 국내외 항공사들은 와인 선물 투자를 통해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방 차장은 "예컨대 2010년에 생산될 와인에 대해 올해 미리 정해진 가격에 구매를 하면 2010년에 사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줄어든다"고 말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와인이 대다수

그렇다면 어떤 와인들이 기내 와인으로 선정될까.

방 차장은 "기내는 기압이 낮고 공기 순환이 빨라 와인향이 코에 전달되기 전에 상당 부분 공기중으로 날아간다"며 "지상용 와인보다 좀더 향취가 풍부한 와인을 고르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또 공중에서는 떫은 맛과 신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편이므로 부드럽고 달콤한 와인을 선호한다.

주요 항공사별 대표 와인 정도는 알아둘 만하다.

방 차장은 "일반적으로 항공사들이 선택한 와인은 수많은 경쟁 상대를 뚫고 올라온 '동급 최강'"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피에르 스파 게부르츠트라미너'는 10년째 '장수'하는 화이트 와인이다.

퍼스트 클래스에 제공되는 '샤토 지스쿠르(Chateau Giscours)'도 대한항공의 '얼굴 마담'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샤토 스미스 오 라피트(Smith Haut Lafitte)'를 대표 선수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 4월 기내 와인 선정 당시 최고 점수를 받았다.

해외에선 에어 프랑스와 브리티시 에어라인이 공통으로 '샤토 그뤼오 라로즈(Gruaud Larose)'를 퍼스트 클래스용으로 사용 중이며 아메리칸 에어라인은 갤로사의 '레드우드 크릭 캡 사우(Redwood Creek Cab Sau)'를,칠레 항공사인 란 칠레는 '알타이르(Altair)'를 각각 퍼스트 클래스용으로 제공하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