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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침에] 아버지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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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산 <소설가>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이동.

    초등학교 때까지 내 학적부의 원적지 난에 적힌 주소는 그랬다.

    부산에서 자란 나에게는 생경하기 짝이 없는 주소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원적지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아버지한테 여쭤보았다.

    "으응,그건 아버지 고향이야.언젠가는 나도 가고 너도 가야 할 데가 거기니 잘 암기해 둬라."

    그 뒤로 지도만 보면 반드시 제일 꼭대기에서 '회령'이란 지명을 찾았고,막연히 내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데라고 혼자 되뇌어왔다.

    전쟁이 나기 직전에 할머니가 먼저 서울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에 아버지가 오지 않으니 할머니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다시 삼팔선을 넘어 아버지를 찾아가신 모양이고,할머니가 서울을 떠나신 직후에 아버지는 회령의 가산을 모두 정리해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삼팔선 경계가 강화되어 서로 오갈 수 없게 되었다.

    단 한 번 어긋난 그 길이 두 모자(母子)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명절만 되면 울었다.

    그래서 명절은 내게 우울하고 슬픈 날이었다.

    고독한 아버지를 둔 덕택에 오가는 일가친척은 아무도 없었고,성묘가 무엇인지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얼마 전에 지나간 추석 명절에도 나는 밝은 달을 쳐다보며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소리내어 우시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느 해 아버지는 동네사람들을 전부 불러모아 잔치를 연 적이 있었다.

    당시로선 꽤나 성대한 잔치였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가 할머니를 만나 뵐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아버지가 잔치를 연 이유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의 일이었다.

    살아서 비극적이었던 만큼 돌아가실 때도 아버지는 비극적이었다.

    1983년,TV에서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한창이었다.

    아버지는 칠순이 넘은 나이로 매일 TV를 보며 우셨다.

    TV에서 며칠 동안 눈을 떼지 않았고,밤에도 도통 잠을 주무시지 못했다.

    아예 손수건을 손에 쥔 채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아무래도 네가 구청에 좀 다녀와야겠다."

    "구청엔 왜요?"

    "네 할머니가 그때 이북으로 안 올라가시고 이남 어딘가에 살아 계실지도 모르지 않니?"

    결국 나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구청에 가서 구십이 넘은 내 할머니 '서금례'씨를 찾는다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서를 작성했다.

    바로 그날 밤에 아버지는 TV를 보시다가 스르르 모로 쓰러지셨고, 사흘 뒤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나는 의도적으로 이북과 관련된 소식을 듣지 않았다.

    이북과 관련된 모든 일을 마음속으로 거부하고 부정했다.

    그날 이후론 회령이 내 원적지라는 사실 역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마치 이북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아버지의 한이 자식인 내게는 분노가 되었으리.더러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나오면 황급히 채널을 돌리거나 아예 TV를 꺼버렸다.

    북한을 돕자는 정권을 향해서는 욕도 했고,심지어 통일 따위를 무엇 하러 하느냐고 회의도 품었다.

    설령 통일이 되어도 북한에는 가지 않겠노라 다짐도 했다.

    북한과 북한 사람들이 내게는 모두 원수와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아버지처럼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지난 며칠간은 잠을 못 이루고 채널을 돌려가며 되풀이하는 화면을 보고 또 본다.

    좀처럼 뵈지 않던 아버지가 며칠 계속해서 꿈에 보이고,백두산 관광이 실현되면 회령까지는 얼마나 될까,지도를 꺼내놓고 어림대중을 해보기도 한다.

    꽤나 오래고 먼길을 돌아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오지만,어차피 7000만 겨레가 나와 같은 수많은 과거지사를 땅에 묻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마당이니 어찌 흔쾌히 동참하지 않으랴!

    내 눈앞에서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펼쳐지는 저 장관이 부디 환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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