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이너 윤문효씨(38)는 자신이 11년간 다져온 자동차 디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외형적으로 잘빠진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동차는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에 안전을 고려해 과학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디자인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
지금까지 윤씨가 현대·기아자동차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세상에 내놓은 모델은 구형 스포티지(1993),뉴 스포티지(2004)와 2004년부터 2년간 디자인 작업에 착수,내년 초 시중에 공개될 예정인 대형 SUV HM(프로젝트명) 등이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모습을 본다는 건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매우 짜릿한 일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디자이너의 꽃'으로 불릴 만큼 수많은 디자인 학도들이 꿈꾸는 직업이지만 자동차를 디자인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전국의 도로에 수천 만대의 자동차가 굴러다니지만 국내에서 완성된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업체는 손가락 안에 꼽히고,그만큼 자동차 디자인실의 문은 좁을 수밖에 없기 때문.
하지만 운 좋게도 윤씨는 1996년 계명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기아자동차 디자인실에 들어가 지금까지 자동차와 동고동락하며 지내고 있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동차 디자이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로 1992년 대학교 2학년 때 선후배들과 만든 자동차 디자인 동호회 'VIEW'를 소개했다.
그는 "강의실에서 배운 공업 디자인 수업보다는 동호회를 통해 자동차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상의 자동차들을 작품으로 제작해 전시하면서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윤씨가 기아자동차 디자인실에 들어가 맡은 첫 임무는 '마이너 체인지 모델' 작업으로 기존에 나와 있던 모델을 조금씩 손보는 과정이었다.
자동차가 출시됐다고 해서 그 디자인으로만 계속 생산되는 게 아니라 연도별로 각각의 부위에 수정이 가해진다.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잘못 그은 라인 하나로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책임감이 무겁다"고 토로했다.
진흙으로 제작되는 실물 모형 하나에만 수억 원이 들 만큼 다른 제품 디자인과는 달리 하나의 자동차 신모델이 탄생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과 돈이 투입된다.
자동차 디자인은 법규와 기술적인 기준이 유난히 까다로운 분야라 디자이너들이 쏟아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디자인으로 접목시키기까지는 조율하는 동안 항상 진통이 따른다.
예를 들어 앞 범퍼를 튀어 나오지 않게 매끈하게 만들면 외관상 예뻐 보일 수 있지만 안전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요소를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
이런 자동차 디자인 관련 법규들은 디자이너로 입문하자마자 바로 숙지하기보다는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면서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익혀간다.
처음부터 법규들을 다 익히면 자유로운 발상에 제한이 가해지기 때문.
그는 "보통 하나의 자동차 모델이 세상에 탄생하기까지는 디자인 작업 기간만 2년 정도 소요되는데 앉아서 작업이 가능한 다른 디자인과 달리 자동차 디자인은 실제 사이즈로 제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 범위가 넓어 체력적인 소모가 크다"고 설명했다.
1997년 2년간의 힘든 작업 과정을 거쳐 드디어 첫 작품이 세상에 나올수 있는 역사적인 순간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해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맞으면서 그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에겐 그때가 일생에서 최대 위기 순간이었다.
그는 "회사의 부도,외환위기 등으로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동료들도 하나둘 떠나고 나도 디자인 분야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몇 주간 고심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해온 게 억울해 직접 디자인한 자동차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오기 하나로 버텼다고.그후 2004년 그의 바람대로 '뉴 스포티지'로 대박 자동차를 일궈냈다.
뉴 스포티지는 출시된 이후 올해 8월까지 46만9000여대가 팔려 나갈 정도로 기아자동차의 빅히트 모델이 됐다.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는 주변의 사물을 보고 자동차 디자인에 접목시킬 수 있는 치밀한 관찰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씨는 국산 자동차 디자인이 외제차에 비해 떨어진다는 주변의 평가에 대해 "외국에서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아이디어가 좋고 스케치력이 좋아 인기가 많은데 유독 국내에서만 한국 디자이너들을 그만큼 평가해 주지 않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100년의 디자인 역사를 가진 유럽과 비교할 수 없지만 아우디나 벤츠와 달리 국내 업체는 아직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할 때"라며 "지금은 '디자인 DNA'를 찾아가는 단계로 지켜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부터 2년에 걸친 작업으로 HM의 디자인이 탄생했다"며 "가장 신경 쓴 디자인 부위는 앞면"이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운전할 때 자동차의 뒷모습을 많이 보지만 차를 선택할 때는 대부분 앞면을 본다"며 "이번에 출시될 HM은 남성적인 강인함을 느끼게끔 앞부분의 디자인에 힘을 준 모델"이라고 덧붙였다.
안상미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