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 사람'이자 자연주의 에세이스트인 박원식씨에게 산은 학교다.

수천 년 역사 속에 선인들의 족적과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박씨가 그 선인들 중 스무 명을 '족집게 강사'로 모시고 산 이야기를 들려 준다.

온달 장군과 최치원부터 김시습,이황,정약용,이매창,김삿갓,경허·만공 스님과 강증산까지 '과외 선생님'들의 이력도 다양하다.

명산 순례기 '천년산행'(크리에디트)에 그 얘기가 담겨 있다.

내변산 쌍선봉에선 개성의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명기(名妓)이자 시인이었던 이매창(1573~1610)의 풍류와 사랑과 문학을 말하고,흑산도 선유봉에선 '현산어보'의 저자 정약전의 방대한 학문 세계를 들려 준다.

또 충남 예산의 덕숭산에선 "백초(百草)가 불모(佛母)"라며 "풀밭 속에도 부처가 있다"던 만공 스님의 가르침을 되살리고 전남 강진 만덕산에선 다산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천일각에서 백련각으로 이어지는 소로가 바로 다산이 혜장을 만나러 드나들었던 산길이다.

말하자면 이 길은 당대 최고의 석학과 최고의 학승이 만난 '유(儒)·불(佛) 소통의 크로스 로드'이자 '다산 철학의 길'이었다.

…다산 또한 봄의 만덕산을 올랐을 것이다.

이 작지만 옹골찬 산을 사시사철 즐겨 탐승했을 게 분명하다."

다산을 만난 뒤엔 해남 두륜산으로 옮겨 다성(茶聖) 초의 선사를 스승으로 맞이한다.

대흥사와 일지암,초의와 추사의 42년 우정과 지성의 대화를 되살려 낸다.

"꽃만 향기를 뿜는 게 아니다.

우정도 향을 흩뿌린다.

초의는 해남에,추사는 제주나 서울에,둘의 물리적 상거(相距)는 천 리였지만 깊은 정의는 그 거리를 메우고도 남는 천리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천 년 고찰 개암사를 품고 있는 전북 부안의 우금산은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의 자취가 서린 곳.천지개벽 공사를 했던 곳이 바로 개암사다.

성냥 몇 개비로 비를 부르는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불신과 조급증에 빠진 종도들을 질책하는 방편이었으며 세상의 개벽에는 적당한 때가 따로 있다는 기별이었다'고 해석한다.

이렇듯 저자는 속리산에서 임경업 장군을 만나고 마대산에선 김삿갓과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며 산과 역사와 인물 이야기를 들려 준다.

등산 인구 1000만 시대라지만 진정 산을 즐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앞사람 발꿈치만 쫓아가는 산행은 아닌지,오로지 정상을 밟기 위해 극기 훈련하듯 오르는 건 아닌지….그렇다면 이 책을 들고 산으로 가 보자.400쪽,1만6000원.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