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 커녕 협찬만 밀려드는 환경에선

세계 무대서 통하는 디자이너 못나와"

디자이너 박항치씨(66)는 패션업계의 '미스터 쓴소리'로 통한다.

디자이너들의 '밥줄'을 쥐고 있는 백화점 사장을 만나서도 매출 수수료 문제를 놓고 언쟁을 서슴지 않을 정도다.

작년 초엔 서울시 초청 행사에서 당시 시장이던 이명박씨와 패션업계 지원책을 놓고 "제가 워낙 성질이 고약해서 할 말은 해야겠다"며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1989년 SFAA를 창립,국내 최대 패션 쇼인 서울컬렉션을 이끌고 있는 노장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이 서릿발 같은 '쓴소리'의 원동력이다.

그가 'BAKANGCHI & 드라마'란 이름으로 지난 10일부터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35년 디자인 인생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패션 쇼가 아니라 전시회를 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한국에 별로 없을 겁니다.

전시할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에요.

역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브 생 로랑,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유럽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습작까지 모아서 전시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죠.저는 다행히 작년부터 취미삼아 제작한 연극,뮤지컬 무대 의상들 중에서 볼 만한 것들이 꽤 있다고 해서 전시회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디자이너가 없는 한국 패션업계의 현실과 뿌리가 같은 얘기로 들렸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파리 밀라노 뉴욕 같은 세계적인 컬렉션에 50명쯤 되는 디자이너들을 내보내고 있어요.

우리도 그만큼 역량 있는 분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와 관련,박씨는 "디자이너는 예술가도 장사치도 아니다"며 "오히려 스포츠 맨과 유사한 사람들"이라고 독특한 디자이너론(論)을 폈다.

"골프 선수 키우듯이 기업이나 정부가 후원해 줘야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는 디자이너가 배출될 수 있는 겁니다.

일본의 '와르도(world)' 같은 기업은 디자이너와 5년 장기 계약을 맺고 오로지 디자인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마케팅 같은 자질구레한 일은 기업이 알아서 하고 후원한 디자이너가 만든 옷들을 상품화해서 이익을 가져가는 식이죠." 이에 비해 한국은 "후원은커녕 TV드라마,영화 등 온갖 곳에서 공짜로 옷을 협찬해 달라는 사람들 투성이"란 게 박씨의 하소연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