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양날의 칼'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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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浩 < 자유기업원 원장 >
기업은 적응하는 존재다.
주위 환경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 생존하고 번성하기 어려운 것이 기업이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줘야 살 수 있었던 시절에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주변 환경과 맞서 싸우다 도산하기보다는 무릎을 꿇어서라도 생존하고 번성하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의미에 충실하다.
환경에 맞서는 기업은 기업이 아니라 이념단체 쪽에 가깝다.
시대가 바뀌어 시민단체라는 새로운 상대가 나타났을 때도 기업들은 그렇게 했다.
적응의 달인(達人)들답게 기업들은 시민단체의 마음을 사는 방법도 터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업이 본업 이외의 일에 돈과 노력을 들여야 함을 뜻했다.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다수의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기업보다는 제품의 값이 좀 비싸고 품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착한 기업,존경받는 기업이 되기를 대중들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대학을 지원해야 하며,예술인을 도와야 한다.
바쁜 근무 시간을 쪼개서라도 연탄을 배달하고 불우이웃을 위해 김치도 담가 주어야 대중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의 압력도 줄어들며 소송도 덜 당하게 된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은 이미 세계적 추세가 됐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회사의 중요한 경영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기업 경영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채택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세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 동안 대부분의 신흥독립국들에 대세는 사회주의였다.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길이었음은 40년이나 지나고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밀려올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회적 책임 중에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
법을 지키고,투명하게 경영하는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업의 책임이다.
기업이 그런 책임을 잘 지킬 때에 원가는 낮아지고 생산성은 더욱 오를 것이다.
그 덕분에 소비자도,근로자도 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적 책임이 있다.
기업과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베풀어주어야 하는 책임이다.
그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원가가 높아져 결국 제품의 가격도 높아지게 된다.
투자의 수익성도 낮아질 것이다.
그건 소비자에게도,근로자에게도,투자자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자선과 기부가 비록 대세이기는 하지만 대세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자선과 기부에 나서는 것은 그를 통해 대중들로부터의 공격을 막고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과거에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훌륭한 경영전략이었던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평소에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두어야 공격도 피할 수 있고 덕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무원이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갖는 현상 자체를 좋다고 볼 수는 없다.
똑같은 원리로 기부와 자선을 통해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좋은 경영전략인 것은 사실이지만,대중과 여론이 기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기업의 할 일은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의 이익에 기여하고,또 높은 수익을 내서 주주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심판자는 소비자와 투자자여야 한다.
대중과 여론이 기업의 심판자가 되면 기업은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책임 운동의 대부 격인 미국의 랄프 네이더는 기업이 주주가 아니라 대중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책임의 요구는 그런 생각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사회적 책임 운동의 물결로 인해 기업에 대한 대중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사기업들은 조금씩 공기업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기업은 적응하는 존재다.
주위 환경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 생존하고 번성하기 어려운 것이 기업이다.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줘야 살 수 있었던 시절에 대부분의 기업들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주변 환경과 맞서 싸우다 도산하기보다는 무릎을 꿇어서라도 생존하고 번성하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의미에 충실하다.
환경에 맞서는 기업은 기업이 아니라 이념단체 쪽에 가깝다.
시대가 바뀌어 시민단체라는 새로운 상대가 나타났을 때도 기업들은 그렇게 했다.
적응의 달인(達人)들답게 기업들은 시민단체의 마음을 사는 방법도 터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업이 본업 이외의 일에 돈과 노력을 들여야 함을 뜻했다.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다수의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기업보다는 제품의 값이 좀 비싸고 품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착한 기업,존경받는 기업이 되기를 대중들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하고,대학을 지원해야 하며,예술인을 도와야 한다.
바쁜 근무 시간을 쪼개서라도 연탄을 배달하고 불우이웃을 위해 김치도 담가 주어야 대중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의 압력도 줄어들며 소송도 덜 당하게 된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은 이미 세계적 추세가 됐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회사의 중요한 경영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기업 경영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채택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세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 동안 대부분의 신흥독립국들에 대세는 사회주의였다.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길이었음은 40년이나 지나고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밀려올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회적 책임 중에도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
법을 지키고,투명하게 경영하는 일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업의 책임이다.
기업이 그런 책임을 잘 지킬 때에 원가는 낮아지고 생산성은 더욱 오를 것이다.
그 덕분에 소비자도,근로자도 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적 책임이 있다.
기업과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베풀어주어야 하는 책임이다.
그 결과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원가가 높아져 결국 제품의 가격도 높아지게 된다.
투자의 수익성도 낮아질 것이다.
그건 소비자에게도,근로자에게도,투자자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자선과 기부가 비록 대세이기는 하지만 대세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자선과 기부에 나서는 것은 그를 통해 대중들로부터의 공격을 막고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과거에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훌륭한 경영전략이었던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평소에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두어야 공격도 피할 수 있고 덕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무원이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갖는 현상 자체를 좋다고 볼 수는 없다.
똑같은 원리로 기부와 자선을 통해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 좋은 경영전략인 것은 사실이지만,대중과 여론이 기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것은 좋지 않다.
기업의 할 일은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의 이익에 기여하고,또 높은 수익을 내서 주주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심판자는 소비자와 투자자여야 한다.
대중과 여론이 기업의 심판자가 되면 기업은 정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책임 운동의 대부 격인 미국의 랄프 네이더는 기업이 주주가 아니라 대중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책임의 요구는 그런 생각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리고 전 세계적인 사회적 책임 운동의 물결로 인해 기업에 대한 대중들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사기업들은 조금씩 공기업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