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자들이 가족력(家族歷)의 영향을 받는다고 밝혀낸 질환은 1만 가지가 넘는다.

고혈압 당뇨병 비만 고지혈증 심장병 통풍 등의 성인병과 암은 물론 정신분열증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에 이르기까지 가족력이 작용한다.

최근에는 척추질환 여드름 코골이까지 가족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의사도 있다.

가족력은 가족,보다 넓게는 같이 사는 사람들의 건강 상태,앓았던 질환,유전성 질환,사망 원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3대에 걸쳐 같은 가계도에서 2명 이상이 같은 질환을 앓는다면 '가족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조부 부모 당숙 백부 숙부 고모 이모 등에게 생긴 질환에 자신이 걸릴 가능성은 여느 사람보다 높은 것이다.

가족력은 혈연 간 유전자를 일부 공유한 것 이외에도 비슷한 직업 사고방식 생활습관과 동일한 식사와 주거환경을 가짐으로써 특정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따라서 일종의 '후천적 유전자'로 볼 수 있다.

발달된 현대의학이라도 질병의 발병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으므로 완벽한 휴먼게놈지도나 유전자 검사법이 나오기 전에는 가족력을 참고해야 할 것 같다.

가족력과 유전질환은 다르다.

혈우병 적록색맹 다운증후군 등의 유전질환은 한 가지 유전정보의 이상으로 발병하며 유전될 확률을 예측할 수 있으나 대체로 예방할 방법은 없고 난치성이다.

사전에 유전자검사를 통해 주의를 기울이거나 선제적으로 치료함으로써 큰 합병증을 예방하는 게 전부다.

반면 가족력 질환은 여러 유전정보의 이상과 직업 식생활 주거환경 등의 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병한다.

관련 유전정보의 이상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습관을 교정하거나 조기 진단해 치료하면 예방이 가능하거나 발병 시기를 늦출 수 있다.

가족력이 강한 것은 주로 대사성질환 순환기질환 감염성질환 정신질환 등이다.

고혈압의 경우 부모 모두 정상일 경우 자식에게 발병할 위험이 4%이지만 한쪽 부모만 고혈압이 있으면 8∼28%,둘 다 고혈압이 있으면 25∼45%로 증가한다.

당뇨병은 부모 중 한 사람이 당뇨병인 경우 자식에게 당뇨병이 생길 확률은 15∼20%,양친이 당뇨병인 경우에는 30∼60%로 올라간다.

인슐린 비의존성(인슐린이 조금 부족할 뿐인데 세포가 인슐린에 반응하는 효율이 낮은 상태) 당뇨병의 경우 일란성 쌍둥이에서 발병 일치율은 50∼90%나 된다.

55세 이하 남자가 관상동맥질환에 걸렸다면 형제의 발병 위험은 일반인의 5배나 되고 자매인 경우 2.5배가 된다.

암 중에서는 유방암과 대장암의 가족력이 거의 확실하게 입증돼 있고 난소암 위암 폐암도 높은 가족력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족력의 발병위험이란 것도 민족,지역,연구자,조사 시기,경제 수준 등에 따라 제각각이어서 지나치게 숫자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질병을 예방하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숫자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아이는 부모를 따라간다.

부모가 과식하고 늦게 자고 바르지 않은 자세로 TV를 보고 운동을 게을리하면 아이도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럴 경우 가족력 질환이 자손에게 이양될 위험성이 커진다.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 가족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가족력 질환은 한두 개의 유전자가 발현한다고 해서 대물림되는 게 아니다.

절주 금연 규칙적인 생활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족력도,유전도 아닌데 건강한 부모의 자녀에게서 예기치 못한 질환이 발병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까.

출생 전 태내의 발육환경,환경호르몬 노출,감염 등이 원인일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예컨대 태어날 때 저체중인 사람은 성장해서 심혈관질환과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반대로 과잉체중은 유방암을 겪을 위험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3자의 유전자'로 태내 환경 또는 산모의 건강상태가 주목받고 있다.

/김병성 경희의료원 가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