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영화가 나오려면 '이슈'가 필요하다고 한다.

관객 700만~800만명까지는 영화 자체의 힘과 마케팅만으로도 끌어들일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면 영화 외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 1300만명을 넘겨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오른 '괴물'은 주한미군이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민족주의 논란이 일면서 관객 수를 불려나갔고,'왕의 남자'는 동성애 논쟁과 함께 흥행에 탄력이 붙었다.

'실미도'는 실미도에 끌려갔던 사람들의 소송사건이 보도되면서 뒷심을 제공했다.

요즘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디 워'와 '화려한 휴가'도 일단은 대박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디 워'의 경우 작품성과 애국심 논란이 관객동원에 힘을 보탰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첫 영화이니까 꼭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잇따랐다.

여기까지는 모처럼 나온 흥행영화에 대한 '대접'쯤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느닷없이 두 영화에 대한 '음모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화려한 휴가'는 유인태 의원의 동생 유인택씨가 광주항쟁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다.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볼수록 광주항쟁에 책임이 있는 세력들은 상처를 입게 되고 범여권에 유리하게 된다.

일부 논객이 경쟁관계에 있는 '디 워'를 혹평한 것이나 범여권 인사들이 잇따라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것도 그런 이유다.

반면 비여권,특히 광주항쟁 책임자들에게 직ㆍ간접적으로 맥이 닿아 있는 사람들은 '화려한 휴가'에 집중되는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디 워'를 밀고 있다."

경남 합천의 일해공원이라는 곳에서 '화려한 휴가'상영 소동이 일면서 음모론이 더 증폭되기도 했다.

영화를 상영한 시민사회단체와 상영을 막으려는 '전사모'라는 조직이 충돌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우습고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음모론의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아무리 대선을 몇 달 앞둔 정치의 계절이지만 영화를 매개로까지 '편가르기'를 한다는 것은 상식 이하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상한 소문 탓에 영화를 보러가는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비판과 옹호와 반박들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한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디 워'는 빈약한 스토리를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CG)영상으로 커버한 전형적인 오락영화다.

엄마아빠가 아이들 손 잡고 가서 팝콘 먹으며 보기에 딱 좋다고 할까.

또 '화려한 휴가'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소재로 만든 상업영화의 영역에 속해 있다.

역사적 진실을 캐내기보다는 비극의 한 가운데 서 있던 평범한 남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멜로드라마다.

우리사회의 편가르기를 없애야 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잔존한다.

편가르기 논란이 영화계에까지 등장한 것을 보니 당분간 없어질 것 같지도 않다.

25일까지 '디 워'는 800만명,'화려한 휴가'는 650만명 안팎의 관객이 봤다.

그 중에 몇 명이 음모론의 영향을 받아 극장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정치권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음모가 있든 말든 대부분의 관람객은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맘 편히 영화를 영화로 보고 싶을 뿐이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