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콥터로 돈 뿌려서라도 디플레는 예방"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초래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할 주인공으로 지목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버냉키 의장이 최근 시장참가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시장참가자들은 물론 기업 최고경영자(CEO)까지 나서 연 5.25%인 기준금리(연방기금금리)의 인하를 요구하고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견조하며 현재의 위기는 비용상승의 위기가 아닌,유동성의 위기'라는 판단엔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는 어쩌면 모험을 하고 있다.

그의 의지와 방법대로 이번 위기를 수습할 경우 그린스펀 전 의장 못지않은 권위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다.

반대로 시기를 놓쳐버릴 경우 '완고한 경제학자 출신 FRB 의장의 한계'를 절감할지 모른다.


학자적 원칙론 고수…"경제학 알려면 대공황 연구" 한우물

# 유대인 출신의 수재형 경제학자

버냉키는 유대인이다.

1차대전 후 할아버지가 미국에 이민왔다.

할아버지는 유대교 율법학자이자 히브리어 교습자였다.

버냉키도 할아버지에게 히브리어와 유대교 율법을 배웠다.

이런 유대인 특유의 조기교육이 '원칙론자'로서의 모습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버냉키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딜론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다.

딜론고교 졸업식 때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할 정도로 알아주는 수재였다.

당시 그의 대학 수학능력시험(SAT) 점수는 1600점 만점에 1590점.사우스캐롤라이나주 수석이었다.

그는 1975년 하버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주머 쿰 라우디(최우수 논문상)'를 받는 등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979년 MIT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스탠퍼드대와 프린스턴대 교수를 23년간 역임했다.

교수 시절의 경험이 원칙과 논리를 중시하고 토론을 즐기는 성격의 경제학자 버냉키를 만들었다.

# '헬리콥터 벤''Mr.Deflation'

경제학자로서 그는 1930년대에 발생한 대공황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대공황의 원인을 분석하고 정책적 시사점을 얻는 데 에너지를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스스로를 '대공황 마니아'로 불렀다. 그가 얻은 교훈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인플레이션 못지않게 디플레이션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FRB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올바른 정책을 펴야 한다는 점이다.

버냉키가 2002년 11월8일 밀턴 프리드먼 교수의 90세 생일축하연에서 프리드먼에게 한 말은 버냉키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밀턴,당신이 옳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FRB)는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대공황이 투기과잉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인지 아니면 FRB의 서툰 대응의 산물인지 논란이 수십 년간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프리드먼이 FRB에 책임을 돌리며 '화폐적 현상'을 지목한 데 대해 버냉키가 100% 수긍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버냉키의 이런 학문적 결론은 FRB 이사로 취임하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다.

FRB 이사로 취임한 지 고작 3개월이 지난 2002년 11월21일.그는 이코노미스트클럽 연설에서 "통화당국은 얼마든지 디플레이션을 방지할 수 있다"며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서라서도 디플레이션을 예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는 디플레이션이 화두가 됐던 시절.교수 출신의 신출내기 FRB 이사가 이런 발언을 했으니 시장참가자들은 귀가 번쩍 뜨일 만도 했다.

이런 연유로 그에겐 '헬리콥터 벤'과 'Mr.Deflation'이란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었으며 취임 초기만 해도 그는 인플레이션에 관한 한 '비둘기파'로 분류됐다.

#'그린스펀 풋' '버냉키 콜'

버냉키는 교수 시절인 2000년 1월5일자 월스트리트저널에 '그린스펀이 퇴진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What Happens When Greenspan Is Gone?)'라는 기고문을 통해 그 유명한 '인플레이션 타기팅(물가관리 목표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면서도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인플레이션의 최소 수준을 인식케 해 디플레이션을 예방하자는 의도에서다.

그가 인플레이션 타기팅을 주창하면서 내걸었던 효과 중 하나가 통화정책의 투명성 확보.FRB 의장으로 취임한 뒤 비록 제도 도입을 유보했지만 통화정책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노력은 계속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든가,"미국 경제는 견조하다"는 식의 평이한 직설화법을 즐겨 했다.

그러다보니 취임 초기 그의 발언은 하루가 멀다하고 시장에 영향을 끼쳤다.

어느 날 그의 발언 덕분에 주가가 오르는 '버냉키 랠리'가 펼쳐지다가도 바로 다음 날 그의 말 한마디에 '버냉키 쇼크'가 일어나면서 증시가 흘러내렸다.

CNBC의 여성 앵커 마리아 바티로모와의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으로 시장이 출렁였던 '바티로모 게이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서 나온 말이 '버냉키 콜(Bernanke Call)'이다.

잦은 말바꿈으로 인해 옵션 보유자로 하여금 만기 이전에 권리행사를 촉진시키는 콜옵션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비아냥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임 그린스펀 의장이 시장에 문제가 생길 경우 선제적 금리인하로 유동성을 늘려줬다는 점에서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풋'은 이미 정해진 가격으로 미래에 주식을 파는 파생상품이다. 가격 하락기에 활용된다. 그린스펀이 자산가격 상승은 용인하고 하락에 대해서만 비대칭적으로 대응했다고 해 그런 표현이 사용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버냉키의 이미지는 한가지로 굳어지고 있다.

다름아닌 '인플레이션 파이터'다.

그는 취임 이후 줄곧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비둘기파라는 인식은 사라졌다.

서브프라임 파문이 몰고온 금융위기에서 시장참가자들이 '버냉키 풋'(금리인하)을 애타게 기다릴 정도로 그는 어느새 '소신파 경제대통령'으로 자리잡았다.

# 직관보다는 통계와 원칙을 우선하는 경제대통령

버냉키가 주재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통화정책 발표문에는 빠지지 않는 문구가 하나 있다.

다름아닌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 동향을 보고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월 서브프라임 파문이 터져 시장이 술렁거릴 때 그는 "서브프라임 파문이 경제의 다른 부문으로 전이되는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며 경제 동향에 별 문제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 17일 "경기하강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며 재할인율을 전격 인하하면서 서브프라임 파장의 심각성을 인정했지만 견조한 경제에 대한 믿음이 변했다는 증거가 아직은 없다.

그러다보니 최근 금리인하에 대한 회의론이 부쩍 많아졌다.

원칙론자이자 논리주의자인 버냉키가 통계를 확인하지 않은 채 섣불리 기준금리를 내리지 않을 것이란 추정에서다.

어쩌면 그린스펀이 특유의 직관력과 순발력으로 '마에스트로(거장)'로서의 권위를 굳혔다면 버냉키는 뚝심 있는 원칙론으로 새로운 경제대통령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성공할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뉴욕=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