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2일,'중국사상사'(이등연 외 옮김,일빛)의 저자인 거자오광(葛兆光) 칭화대 교수는 강연에서 "중국사상사 연구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중화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연구방법으로 중국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동양의 대표적 경전인 '논어'는 사실 공자 개인의 저작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제자들이 함께 토론하여 엮은 공자의 언행록이다.

'성경(Bible)' 또한 마찬가지다.

예수가 신의 계시를 받아 단번에 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수많은 선지자들이 노력한 결과다.

이처럼 고전(古典)들은 개인의 저작일 수 없으며,중국을 대표하는 사상 역시 개인의 창작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거자오광의 생각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사상사 연구의 '새로운 글쓰기'를 주장한다.

거자오광은 근래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출토자료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것이 새로운 연구방법론 구상의 계기였다고 말한다.

그는 그 당시를 '장막이 걷어 올려지는 순간'으로 기억한다.

KTX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간다고 가정해 보자.우리는 창밖의 산과 들을 보게 된다.

사실 본다기보다는 지나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속 300㎞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기차 밖의 풍경을 감상한다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먼 산 정도를 볼 수 있을 뿐.그런데 만약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제대로 풍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새마을호나 무궁화호를 타야할 것이다.

빠름과 느림은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결정한다.

이처럼 보는 방법에 따라 보여지는 세계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거자오광이다.

그는 단지 KTX에서 무궁화호로 갈아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차에서 내려 직접 걸어보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길옆에 늘어서 있는 가로수와 꽃들,작은 돌멩이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거자오광은 느리게 보여지는 세계가 오히려 빨리 지나치는 세계보다 더욱 다이내믹한 세계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중국사상사 연구는 이제 '경전 중심의 엘리트 사상'에서 벗어나 미시적 생활세계,즉 비석문,공문서,족보,편지,기술 및 예술 영역의 일상적인 읽을거리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양학 공부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며 생활하는 연구자로서 관련 분야의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현대 중국 사상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거자오광의 연구방법론에 관한 저작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중국 사상계가 재편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매우 시기적절한 듯하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종합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서술방식은 좀 아쉽다.

인문학자는 보이지 않은 그 무엇을 찾아 보이는 집을 짓는 사람이기도 하지만,또 한편으로는 그 집을 허물 수 있는 설계도를 마련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45쪽,1만2000원.



진성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