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미술학의 비조(鼻祖)로 손꼽히는 우현 고유섭 선생이 일제시대 개성의 초대 박물관장을 지내실 때,개성 청년들을 후학으로 삼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당시 고유섭 선생은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갓 졸업한 황수영 선생을 비롯한 후학들에게 "경제학 및 다른 학문은 얼마든지 할 사람이 있네.그러나 이 민족의 고미술학은 민족의 넋을 찾는 일인데 이 같은 연구를 하는 사람이 없다네"라며 그분들을 우리 넋을 찾는 일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이들이 분발해 훗날 우리 고미술학계의 삼걸(三傑)이 되었는데,송암(松巖) 이회림 선생은 인천에 송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이것을 다시 시에 기증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미술품의 진수를 직접 볼 수 있게 됐고,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문화 발전에 측량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리라 생각합니다.

인천 출신인 우현 선생이 개성의 젊은이들을 우리 넋을 찾도록 이끌었다면 송암 선생은 다시 인천에 미술관을 건립함으로써 세대와 분단을 뛰어넘은 인천과 개성의 인연이 문화로 펼쳐지게 했습니다.

평소 송암 선생에게 "선생님은 오늘의 마지막 송상(松商)"이라 말씀드리면 송암 선생은 그 표현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은 인천상공회의소를 책임지고,수년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인천과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셨습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송상이었던 송암 선생은 언제나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어떠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마음으로 개성상인의 근본 정신을 누누이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저는 이제 선생은 비록 멀리 갔어도,바로 그 같은 송상의 정신이 선생을 통해 한국 경제에 뿌리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송암 선생은 "나는 사각모자 쓴 학생이 참 부러웠어"라며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뒤에도 언제나 배움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같은 당신의 자세가 인천의 명문인 송도중·고등학교를 맡아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나서게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자신은 학교를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생활을 경험했지만,피란 나온 타향 인천에서 고향의 명문을 다시 설립해 꽃피웠다는 것,이 정신이야말로 송암 이회림 선생의 철학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어느새 16년쯤 전의 일입니다.

당신은 계간 '황해문화'와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제가 후학들에게 주실 말씀을 여쭈었더니 "시대정신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며,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경륜은 모든 학문의 논리를 넘어서는 진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함축된 당신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고인은 멀리 떠났지만 그 같은 선생의 정신이 우리 경제를 지탱케 하고 나아가 장래에 분단 철조망이 끊어지는 날 통일과 번영의 터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오랫동안 그리울 겁니다.

송암 이회림 선생님!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