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그림은 인생의 방정식을 푸는 도구입니다.

전쟁터의 병사처럼 죽기 살기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처럼 자연을 배우고,녹이고,잊고,들여다 보면서 그리다 보면 '우연'이란 꽃이 활짝 피더라구요."

1970년대 독일로 건너간 간호보조원에서 국제적인 명성의 화가로 변신한 재독 작가 노은님씨(61ㆍ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교수)의 '인생우연론'이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오는 12~31일 '물소리, 새소리'전을 갖기 위해 일시 귀국한 노씨는 "미술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어엿한 예술가로 사는 것 자체가 우연"이라고 말했다.

"1969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초상화를 그린 것이 내 화업의 시작입니다.

스물네살 되던 이듬해 간호보조원으로 독일 함부르크로 건너가 병원에서 일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어요.

1972년 겨울 어느날 독감으로 결근했을 때 병문안 왔던 간호장이 방에 가득 쌓인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그가 병원 한 켠을 전시장으로 꾸며 '여가를 위한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어줬는데 이것이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한스 티만 교수의 눈에 띄었고,이듬해 그 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됐어요."

그는 대학시절 '모든 생명체의 본질은 하나'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살아 있는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을 변형시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유럽화단에서 그의 이름 앞에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그림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끔 낚시꾼에게 붙잡혀 온 물고기처럼 펄떡거려요.

세상을 느끼면서 그 느낌에 따라 울고 웃으며 지냅니다.

내게 미술이 없었더라면 미쳐버렸거나 죽어버렸을지도 모르죠.독일은 나의 그림쟁이 소질을 발견하고 키워 준 고마운 나라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물고기와 새,꽃,나무 등을 동화적인 기법으로 그린 작품 130여점을 보여준다.

전시에 맞춰 그가 독일어로 쓴 시를 한국어로 번역한 시화집 '물소리,새소리(나무와숲)'도 출간됐다.

(02)734-611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