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이 올해 초 선발해 6월부터 현장에 배치한 신입사원들이 대학에서 쌓은 경력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토익성적,학점 등 이른바 '취업스펙'에서는 입사동기들에 비해 뒤떨어진다.
인턴, 아르바이트,공모전,봉사활동,자격증 등 '취업 5종세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남들은 4년 만에 졸업한 대학을 6~7년씩 다녔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이들은 독특한 경력만으로 눈높이가 높기로 유명한 제일기획 면접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제일기획 관계자는 "광고회사의 경쟁력이 창의성인 만큼 창의성을 갖춘 '예술가형 인재'를 뽑다보니 이 같은 결과가 나왔다"며 "그러나 이색 경력 소유자들은 실무 적응 속도도 빠르고 업무 추진력도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프로모션팀에 배치된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출신 김고운씨는 친구들이 "왜 이렇게 사느냐"며 걱정을 하던 '사고뭉치'였다.
대학 1학년 때는 아마추어 모델을 해보겠다며 광고 사진모델 오디션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대부분 떨어지긴 했지만 여러 차례의 오디션 경험을 통해 카메라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만은 확실히 키워졌다고.
2학년이 된 김씨는 이탈리아로 무작정 떠났다.
'평화를 위한 젊은이의 모임'이라는 국제 단체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갔다가 현지 사람들의 인정에 반해 9개월을 머물게 됐다.
체류기간이 길어지자 문제가 된 것은 생활비.
김씨는 고민 끝에 브라질 등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현지 공장에서 일하는 엉뚱한 길을 택했다.
4개월간의 일을 마치자 영어와 이탈리아어 실력이 어학연수 코스를 밟은 것 이상으로 높아졌다.
공부가 아닌 생활을 통해 어학을 배우는 남다른 길을 택하자 뜻밖의 결과가 나온 것.
이탈리아어를 배우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4학년이었던 2006년 2월 삼성전자가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취재하는 '애니콜 리포터'를 선발했는데 선발 조건이 이탈리아어 가능자였던 것.김씨는 현지에서 삼성전자의 프로모션을 담당하던 제일기획 프로모션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결국 제일기획에 입사하게 됐다.
김씨는 "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제일기획 합격의 비결인 것 같다"며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쪽이 기회가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 출신인 김주표씨는 대학가요제 입상,음악전문 방송 엠넷(m.net)의 VJ,게임전문 채널 엠비씨게임(mbcgame) MC 등의 이색 경력을 갖춘 만능 엔터테이너다.
관심영역이 다양했기 때문에 도서관에 머문 시간은 극히 적었다.
졸업 무렵 F를 맞은 과목을 세어보니 10과목이나 됐을 정도다.
김씨는 "방송국에서 일을 하다보니 다양한 실무경험이 생겼고 업무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며 "특히 프레젠테이션 능력이 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게 학교생활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의 균형을 어떻게 가져가는 것이 옳으냐고 묻자 "리포트는 제때 내야겠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순옥씨는 연세대 응원단(아카라카) 단장 출신.여성 응원단장이 드물던 때인 만큼 단원들을 통솔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박씨는 "일이 고되면 문을 걷어차고 나가버리는 남자 동료나 후배들이 나온다"며 "너무 힘들어 남몰래 운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을 이끌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은 박씨에게 큰 '자산'이 됐다.
그는 "팥빙수 미팅,1대 1 설득 등 조직의 팀워크를 북돋우기 위해 동원했던 수백 가지 방법이 직장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인 민고은씨는 오로지 영화·다큐멘터리 제작 경력만으로 제일기획 카피라이터가 됐다.
민씨는 2학년이었던 2003년 6·25전쟁을 겪은 노인들의 증언록 형식의 '할머니,라면을 먹지 그랬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아시아나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졸업작품으로 지난해 만든 단편영화 '소풍'도 KT&G 상상마당 공모전,서울여성영화제 등에서 잇따라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민씨는 "졸업작품이 시원찮으면 졸업이 안되기 때문에 오로지 졸업을 목표로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만들었다"며 "제일기획에 합격한 것을 보면 '보상받지 못하는 열정은 없다'는 옛말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