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 김기문 로만손 대표 "시계500개 든 가방들고 다녔더니 오른팔 더 길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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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문 로만손 대표ㆍ중소기업 중앙회장 >
김기문 로만손 회장(52)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조금 더 긴 것으로 유명하다.
회사 설립 이후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30~40kg에 달하는 시계 샘플 가방을 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탓에 그렇게 됐다는 얘기가 업계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지난 5일 저녁 한국경제신문 인근 한 일식집에서 과학벤처중기부 기자들과 만난 김 회장은 '전설'부터 확인하려는 기자들 앞에서 두 팔을 뻗어 보였다.
과연 오른팔이 왼팔보다 엄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길었다.
김 회장은 "와이셔츠를 맞춰주는 재단사 말로는 드물긴 하지만 그런 체형이 있다던데 아무래도 후천적인 것 같다"며 "아는 사람들에게 몇 번 얘기한 게 널리 퍼져 이젠 (그 얘기가) 훈장처럼 따라 다닌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음식에 맞춰 직접 골라온 화이트와인(프랑스산 트리미네)을 마시면서 시작된 대화는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가 들려주는 인생은 '롤러코스터'였다.
그만큼 굴곡이 많고 파란만장했다.
김 회장은 식사 후 양주 폭탄주가 쉴새없이 오가는 가운데도 꼿꼿이 세운 허리를 풀지 않고 빈틈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열변을 토해냈다.
'어깨가 빠질 만큼' 무거운 가방을 들고 세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자수성가한 기업인과 300만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중앙회장다운 자신감과 열정이 이야기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한경기자 '무일푼 창업 성공신화' 들어보다
#기내 와인 마시다 '와인 마니아'로
-와인을 직접 골라 오다니 뜻밖입니다.
"마니아라고 불릴 만큼 와인을 즐겨 마십니다. 국내에 와인 붐이 일기 7~8년 전부터 와인을 마셨어요.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고 비행기 내에서 공짜로 주는 와인을 조금씩 마시면서 빠져들었어요.
창업 초기부터 해외를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마일리지(대한항공)가 170만마일쯤 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좋은 와인도 대접받습니다."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보통 와인 한 병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보다는 더 마시지요.
예전에는 (잘 마시는) 누구 못지 않게 마신다고 대답했는데 요즘 그랬다가는 큰코 다쳐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과거에는 정말 잘 마셨던 것 같고,지금도 잘 하는 편이지만 예전만 못하죠."(김 회장은 요즘도 협동조합 이사장들과의 술자리에서 40~50여명의 술잔을 거뜬히 받아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장에 취임한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몹시 바쁜 듯하던데.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중앙회 업무가 거의 100%지요.
전에는 하루에 한 시간씩 헬스장에 다녔는데 중앙회장을 맡고 난 후로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러닝머신을 샀어요.
아침에 TV 뉴스를 보면서 30~40분씩 빠뜨리지 않고 하려고 노력합니다.
골프도 많이 못하고 있고요.
이렇게 힘든 걸 다들 왜 그렇게 하려고 난리치는 건지,로만손 업무는 매일 서류로만 보고받습니다.
19년간 해온 일이니까 그것만 봐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아요."
#논 100마지기 넘는 종가의 종손
-종가의 종손으로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 집이 잘 살았죠.할아버지께서 트럭으로 쌀장사를 하셨어요.
시골에서 쌀을 사다 서울 뚝섬에서 파는 장사였어요.
논이 100마지기가 넘었고 겨울에 우리집 사랑방에서 새끼 꼬는 일꾼만 열 명 이상일 정도니까.
나이롱(나일론)하고 고리땡(골덴) 바지는 내가 고향에서 처음 입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조선일보 충청북도 주재기자를 했는데,그때는 기자 끗발이 지금의 100배 정도는 됐을 걸요."
-그러면 어릴때 어깨에 힘좀 주고 다녔겠습니다.
"정반대였죠. 좀 순박했다고나 할까.
할아버지께서 서울에 다녀오실 때마다 연필이랑 필통 같은 것을 사오셨는데 학교만 가면 이것들을 다 뺏기고 왔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학교로 찾아와서는 '누가 제일 네 연필을 많이 뺏느냐'며 그 애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 아이와 나를 냇가로 데려 가서는 아이들 보는 앞에서 '절대 내 아들 편 안 들 테니까 둘이 한 번 싸워보라'고 시키시더라고요.
근데 막상 붙어 보니 게임이 안 됐어요.
반에서 세 번째로 잘 싸우는 아이였는데 내가 먹기도 잘 먹고 키도 컸으니까.
바로 '싸움 넘버 3 '쯤 된거죠."
-농고에 들어간 특별한 사연이 있었나요.
"어릴때 TV에서 본 '자이언트'란 영화의 영향이 컸어요.
주인공이 제임스 딘인데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초원에서 소를 몰고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중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는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주농고를 갔어요.
근데 막상 가보니 '이건 아니다'싶더라고요.
내친 김에 대학도 축산학과(충북대)로 갔으나 결국 그만뒀지요.
이상과 현실이 달랐던 거죠."
-군대에서 '사업가적 기질'을 십분 발휘했다면서요.
"논산훈련소에서 PX병으로 근무했어요.
군인들 먹는 것을 관찰해 보니 시간대마다 딱 찾는 게 정해져 있었어요.
각개전투할 때는 배가 금방 꺼지니까 무조건 빵이 잘 팔리고 힘이 덜 드는 제식훈련 때는 과자,날이 더운 날은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가 잘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미리 훈련 스케줄을 파악해 물품대 진열을 매번 바꿨지요.
훈련소 내 30개 PX 중 늘 매출 1위를 차지하니 연대장이 좋아하더군요.
포상휴가도 몇 번 갔지요.
간단한 상술이었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요."
-그런 센스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셨나 봅니다.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인 것 같은데요.
1980년대 초 어머니께서 폐암에 걸리셨는데 치료비가 상당해서 집안이 좀 기울었어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갔지요.
그곳에 있을 때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실 것 같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후 인생관과 삶의 태도가 많이 변했습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변했다고 할까.
효도 한 번 못하고 고생만 시켜드린 채 돌아가시게 하다니 너무 안타까웠지요.
어머니께서 '동생들을 잘 챙기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는데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김 회장은 이 얘기를 하면서 잠시 목이 메었다.)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우디로
-사우디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독일의 '사프리카'라는 업체에서 근로자들의 작업환경과 안전시설을 점검하는 안전관으로 근무했어요.
중동에 가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 영어 공부를 좀 했습니다.
당시에는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인이 드물었고 일만 열심히 한 덕분에 우수한 인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독일 업체 관리자가 '싱가포르로 옮기는데 같이 가서 일해보자'는 제의까지 받았으니까요."
-귀국 후에는 조그만 시계회사를 첫 직장으로 잡았던데.
"그때는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아는 분이 함께 시계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솔로몬시계공업사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고 저는 영업부장으로 일했어요.
이전까지 시계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지만 일하면서 많이 배웠지요.
업계에서 꽤 인정도 받았고 잘 나갔습니다.
근데 영화를 제작하던 친척분에게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분 영화사업이 망하면서 서울 장안동에 있던 3층 양옥집도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게 됐어요.
회사도 더 다닐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서 그만두었고.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내수 시장보다는 중동 등 해외 시장으로
-정말 무일푼 신세가 되었네요.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저를 좋게 봐 줬던 거래처 사장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업 자금을 모아 줄 테니 김형 재능을 살려 보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힘을 얻어 자본금 5000만원으로 로만손을 설립하게 됐지요.
당시에 시계 산업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다 호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수 시장은 삼성시계 아남시계 오리엔트 등 큰 기업들이 다 가지고 있어서 갓 창업한 작은 회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어요.
결국 브랜드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해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죽어라 뛰었지요.
중동을 비롯해 해외에서 시계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면 무조건 달려가서 샘플을 전시했습니다."
-중동에서는 밀수꾼 취급도 받았다면서요.
"해외에 갈 때 샘플을 무식하게 많이 가지고 다녔어요.
007가방에는 시계가 많이 안 들어가니까 큰 트렁크 백을 두 개나 메고 들고 다녔으니.가방 하나에 시계가 500개씩은 들어갔으니 무게가 30~40kg은 됐어요.
한번은 사우디아라비아 세관에서 '세일즈 상담하러 온 게 아니라 이걸 여기서 다 팔아먹고 가려는 거 아니냐'며 밀수꾼으로 보더라고.명함을 보여주면서 '견본품이다,여기서 만나고 갈 바이어가 엄청나게 많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어 주질 않는 거예요.
거래 내역서나 초청장 등을 보여주며 간신히 풀려나긴 했지만 시계는 전부 압수당했지.그 후에도 여전히 샘플을 많이 들고 다녔어요.
그게 장사꾼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해요."
-로만손은 커팅 글라스와 코인시계 로즈골드도금시계 등 히트작을 잇따라 터뜨리며 해외 시장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성공 비결을 꼽는다면.
"간단히 말하면 현실적으로 부닥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고 머리 싸매고 노력한 결과 나온 것들이지요.
아이디어는 선견지명이나 그럴싸한 이론서 등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현실에서 돌파구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집착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밤잠도 설치면서 고민하다 보면 결국 해결책이 나옵니다."
#로만손은 종합 패션 브랜드
-(윤진식 과학벤처중기부장이 차고 있던 시계를 보여주며) 이 로만손 시계는 '메이드 인 스위스'인데요.
"일부 제품은 스위스에서 최종 조립을 하기 때문이지요.
스위스산 시계라고 하면 훨씬 단가를 비싸게 받을 수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데 우리 회사 시계 정말 잘 만들지 않나요.
거의 환상적으로 만든다니까.
로만손이란 이름은 시계 원산지로 알려진 스위스 마을 '로만시온'에서 따왔어요.
로만손이 세계 최대 시계박람회인 바젤 전시회에서 명품관으로 들어갈 만큼 유명해지니까 2002년쯤인가,국제 세미나에서 만난 아벨란제 스위스 시계협회장이 '스위스의 이름을 도둑맞았다'며 한마디 하더군요."
-2003년에 주얼리 시장에 뛰어들었는데요.
"로만손은 이제 시계전문회사가 아닌 종합 패션 브랜드를 지향합니다.
사실 국내에서는 주얼리 브랜드인 '제이에스티나'의 매출이 시계 매출을 훨씬 앞지르고 있어요.
주얼리분야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시장입니다.
조만간 제이에스티나 이름으로 핸드백과 구두도 내놓을 겁니다."
-2005년 개성공단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좋지 않았던 시계 업황과 관련이 있습니까.
"로만손은 굳이 개성공단에 입주하지 않았어도 됐어요.
중국과 스위스 부품 공장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 시계업계 인프라가 붕괴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8개 협력업체들과 함께 간 것입니다.
국내 산업 기반이 무너지면 결국 우리도 힘들어지기 때문이지요."
#산업은행서 엔화 빌려 개성공단 입주
-개성공단기업협의회장을 맡고 있는데 개성 관련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우여곡절도 많았지요.
당시 수출입은행에서 개성공단 입주 자금을 지원해 준다고 해서 갔더니 완전히 소설책 한 권을 써 오라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 후에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해서 자금이 이렇게 저렇게 될 것 같다고 적어 오라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쓸 수는 없고.그동안 거래해 온 산업은행에서 대출받겠다고 했더니 통일부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그래서 담당 국장에게 쏴붙였지요.
'남북경협기금 안 쓰고 스스로 자금을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많냐'고.결국 수출입은행 원화 자금 대신 산업은행에서 엔화 자금 빌려서 개성공단에 들어갔어요.
당시 100엔이 950원이었는데 지금 760원쯤 하니까 원금을 갚고도 돈을 많이 번 거지요."
-중앙회장 취임 후 회사 경영은 동생(김기석 사장)에게 맡겼는데.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을 체질적으로 좋아해요.
식구든 직원이든 능력에 맞게 자리를 배치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왔습니다.
동생도 그런 원칙에 따라 맡긴 것이고 지금까지 경영 성과를 보니 잘하고 있습니다.
중앙회장을 맡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게 인사입니다.
외부에서 누구누구를 봐 달라는 인사 청탁이 막 쏟아져 들어오더군요.
선거에서 '김기문 편'을 들었으니 감안해 달라는 거예요.
내부 직원들에게 우회적으로 몇 번 경고했는데도 끊이지 않더군요.
'이러다간 판을 망치겠다' 싶어 중앙회에서 두 번째 직원 조회를 하던 날 아예 '1년 뒤에 능력에 따라 인사를 하겠다'고 못박았습니다.
지난달 인사를 하긴 했지만 소폭이었습니다."
-둘째 딸이 미국에서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다는데 후계자 경영 수업을 시키는 것인가요.
(김 회장은 딸 둘을 두고 있으며 장녀는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
"둘째 딸은 지금 미국에서 취직할 곳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 어려울 것 같은데요.
가업을 승계하는 것도 좋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회사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업 오너의 2세나 3세나 그렇게 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앉히면 그건 문제가 되지요.
회사를 잘 경영하고 오래도록 지속시킬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경영권을 물려 줄 생각입니다."
-중앙회장 임기 중에 회사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닥친다면.
"내 본업은 어디까지나 로만손 대표입니다.
내 손으로 일군 회사라서 애정이 각별합니다.
중앙회장 업무가 중요하긴 하지만 로만손이 힘든 상황에 빠진다면 회사 사무실로 달려가야겠지요."
정리=송태형/이상은ㆍ사진=강은구 기자 toughlb@hankyung.com
김기문 로만손 회장(52)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조금 더 긴 것으로 유명하다.
회사 설립 이후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30~40kg에 달하는 시계 샘플 가방을 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닌 탓에 그렇게 됐다는 얘기가 업계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지난 5일 저녁 한국경제신문 인근 한 일식집에서 과학벤처중기부 기자들과 만난 김 회장은 '전설'부터 확인하려는 기자들 앞에서 두 팔을 뻗어 보였다.
과연 오른팔이 왼팔보다 엄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길었다.
김 회장은 "와이셔츠를 맞춰주는 재단사 말로는 드물긴 하지만 그런 체형이 있다던데 아무래도 후천적인 것 같다"며 "아는 사람들에게 몇 번 얘기한 게 널리 퍼져 이젠 (그 얘기가) 훈장처럼 따라 다닌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음식에 맞춰 직접 골라온 화이트와인(프랑스산 트리미네)을 마시면서 시작된 대화는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가 들려주는 인생은 '롤러코스터'였다.
그만큼 굴곡이 많고 파란만장했다.
김 회장은 식사 후 양주 폭탄주가 쉴새없이 오가는 가운데도 꼿꼿이 세운 허리를 풀지 않고 빈틈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열변을 토해냈다.
'어깨가 빠질 만큼' 무거운 가방을 들고 세계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자수성가한 기업인과 300만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중소기업중앙회장다운 자신감과 열정이 이야기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한경기자 '무일푼 창업 성공신화' 들어보다
#기내 와인 마시다 '와인 마니아'로
-와인을 직접 골라 오다니 뜻밖입니다.
"마니아라고 불릴 만큼 와인을 즐겨 마십니다. 국내에 와인 붐이 일기 7~8년 전부터 와인을 마셨어요.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고 비행기 내에서 공짜로 주는 와인을 조금씩 마시면서 빠져들었어요.
창업 초기부터 해외를 워낙 많이 돌아다녀서 마일리지(대한항공)가 170만마일쯤 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좋은 와인도 대접받습니다."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보통 와인 한 병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보다는 더 마시지요.
예전에는 (잘 마시는) 누구 못지 않게 마신다고 대답했는데 요즘 그랬다가는 큰코 다쳐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과거에는 정말 잘 마셨던 것 같고,지금도 잘 하는 편이지만 예전만 못하죠."(김 회장은 요즘도 협동조합 이사장들과의 술자리에서 40~50여명의 술잔을 거뜬히 받아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장에 취임한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몹시 바쁜 듯하던데.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중앙회 업무가 거의 100%지요.
전에는 하루에 한 시간씩 헬스장에 다녔는데 중앙회장을 맡고 난 후로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러닝머신을 샀어요.
아침에 TV 뉴스를 보면서 30~40분씩 빠뜨리지 않고 하려고 노력합니다.
골프도 많이 못하고 있고요.
이렇게 힘든 걸 다들 왜 그렇게 하려고 난리치는 건지,로만손 업무는 매일 서류로만 보고받습니다.
19년간 해온 일이니까 그것만 봐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아요."
#논 100마지기 넘는 종가의 종손
-종가의 종손으로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 집이 잘 살았죠.할아버지께서 트럭으로 쌀장사를 하셨어요.
시골에서 쌀을 사다 서울 뚝섬에서 파는 장사였어요.
논이 100마지기가 넘었고 겨울에 우리집 사랑방에서 새끼 꼬는 일꾼만 열 명 이상일 정도니까.
나이롱(나일론)하고 고리땡(골덴) 바지는 내가 고향에서 처음 입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조선일보 충청북도 주재기자를 했는데,그때는 기자 끗발이 지금의 100배 정도는 됐을 걸요."
-그러면 어릴때 어깨에 힘좀 주고 다녔겠습니다.
"정반대였죠. 좀 순박했다고나 할까.
할아버지께서 서울에 다녀오실 때마다 연필이랑 필통 같은 것을 사오셨는데 학교만 가면 이것들을 다 뺏기고 왔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학교로 찾아와서는 '누가 제일 네 연필을 많이 뺏느냐'며 그 애를 데리고 나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 아이와 나를 냇가로 데려 가서는 아이들 보는 앞에서 '절대 내 아들 편 안 들 테니까 둘이 한 번 싸워보라'고 시키시더라고요.
근데 막상 붙어 보니 게임이 안 됐어요.
반에서 세 번째로 잘 싸우는 아이였는데 내가 먹기도 잘 먹고 키도 컸으니까.
바로 '싸움 넘버 3 '쯤 된거죠."
-농고에 들어간 특별한 사연이 있었나요.
"어릴때 TV에서 본 '자이언트'란 영화의 영향이 컸어요.
주인공이 제임스 딘인데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초원에서 소를 몰고 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중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는데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주농고를 갔어요.
근데 막상 가보니 '이건 아니다'싶더라고요.
내친 김에 대학도 축산학과(충북대)로 갔으나 결국 그만뒀지요.
이상과 현실이 달랐던 거죠."
-군대에서 '사업가적 기질'을 십분 발휘했다면서요.
"논산훈련소에서 PX병으로 근무했어요.
군인들 먹는 것을 관찰해 보니 시간대마다 딱 찾는 게 정해져 있었어요.
각개전투할 때는 배가 금방 꺼지니까 무조건 빵이 잘 팔리고 힘이 덜 드는 제식훈련 때는 과자,날이 더운 날은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가 잘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미리 훈련 스케줄을 파악해 물품대 진열을 매번 바꿨지요.
훈련소 내 30개 PX 중 늘 매출 1위를 차지하니 연대장이 좋아하더군요.
포상휴가도 몇 번 갔지요.
간단한 상술이었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요."
-그런 센스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셨나 봅니다.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인 것 같은데요.
1980년대 초 어머니께서 폐암에 걸리셨는데 치료비가 상당해서 집안이 좀 기울었어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갔지요.
그곳에 있을 때 언제나 곁에서 지켜주실 것 같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후 인생관과 삶의 태도가 많이 변했습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변했다고 할까.
효도 한 번 못하고 고생만 시켜드린 채 돌아가시게 하다니 너무 안타까웠지요.
어머니께서 '동생들을 잘 챙기라'고 유언처럼 말씀하셨는데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김 회장은 이 얘기를 하면서 잠시 목이 메었다.)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사우디로
-사우디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독일의 '사프리카'라는 업체에서 근로자들의 작업환경과 안전시설을 점검하는 안전관으로 근무했어요.
중동에 가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한 이후 영어 공부를 좀 했습니다.
당시에는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인이 드물었고 일만 열심히 한 덕분에 우수한 인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독일 업체 관리자가 '싱가포르로 옮기는데 같이 가서 일해보자'는 제의까지 받았으니까요."
-귀국 후에는 조그만 시계회사를 첫 직장으로 잡았던데.
"그때는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아는 분이 함께 시계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솔로몬시계공업사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고 저는 영업부장으로 일했어요.
이전까지 시계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지만 일하면서 많이 배웠지요.
업계에서 꽤 인정도 받았고 잘 나갔습니다.
근데 영화를 제작하던 친척분에게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분 영화사업이 망하면서 서울 장안동에 있던 3층 양옥집도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게 됐어요.
회사도 더 다닐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서 그만두었고.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내수 시장보다는 중동 등 해외 시장으로
-정말 무일푼 신세가 되었네요.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저를 좋게 봐 줬던 거래처 사장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사업 자금을 모아 줄 테니 김형 재능을 살려 보라'는 것이었어요.
그때 힘을 얻어 자본금 5000만원으로 로만손을 설립하게 됐지요.
당시에 시계 산업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다 호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수 시장은 삼성시계 아남시계 오리엔트 등 큰 기업들이 다 가지고 있어서 갓 창업한 작은 회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어요.
결국 브랜드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해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죽어라 뛰었지요.
중동을 비롯해 해외에서 시계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면 무조건 달려가서 샘플을 전시했습니다."
-중동에서는 밀수꾼 취급도 받았다면서요.
"해외에 갈 때 샘플을 무식하게 많이 가지고 다녔어요.
007가방에는 시계가 많이 안 들어가니까 큰 트렁크 백을 두 개나 메고 들고 다녔으니.가방 하나에 시계가 500개씩은 들어갔으니 무게가 30~40kg은 됐어요.
한번은 사우디아라비아 세관에서 '세일즈 상담하러 온 게 아니라 이걸 여기서 다 팔아먹고 가려는 거 아니냐'며 밀수꾼으로 보더라고.명함을 보여주면서 '견본품이다,여기서 만나고 갈 바이어가 엄청나게 많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어 주질 않는 거예요.
거래 내역서나 초청장 등을 보여주며 간신히 풀려나긴 했지만 시계는 전부 압수당했지.그 후에도 여전히 샘플을 많이 들고 다녔어요.
그게 장사꾼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해요."
-로만손은 커팅 글라스와 코인시계 로즈골드도금시계 등 히트작을 잇따라 터뜨리며 해외 시장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성공 비결을 꼽는다면.
"간단히 말하면 현실적으로 부닥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고 머리 싸매고 노력한 결과 나온 것들이지요.
아이디어는 선견지명이나 그럴싸한 이론서 등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현실에서 돌파구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집착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밤잠도 설치면서 고민하다 보면 결국 해결책이 나옵니다."
#로만손은 종합 패션 브랜드
-(윤진식 과학벤처중기부장이 차고 있던 시계를 보여주며) 이 로만손 시계는 '메이드 인 스위스'인데요.
"일부 제품은 스위스에서 최종 조립을 하기 때문이지요.
스위스산 시계라고 하면 훨씬 단가를 비싸게 받을 수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데 우리 회사 시계 정말 잘 만들지 않나요.
거의 환상적으로 만든다니까.
로만손이란 이름은 시계 원산지로 알려진 스위스 마을 '로만시온'에서 따왔어요.
로만손이 세계 최대 시계박람회인 바젤 전시회에서 명품관으로 들어갈 만큼 유명해지니까 2002년쯤인가,국제 세미나에서 만난 아벨란제 스위스 시계협회장이 '스위스의 이름을 도둑맞았다'며 한마디 하더군요."
-2003년에 주얼리 시장에 뛰어들었는데요.
"로만손은 이제 시계전문회사가 아닌 종합 패션 브랜드를 지향합니다.
사실 국내에서는 주얼리 브랜드인 '제이에스티나'의 매출이 시계 매출을 훨씬 앞지르고 있어요.
주얼리분야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시장입니다.
조만간 제이에스티나 이름으로 핸드백과 구두도 내놓을 겁니다."
-2005년 개성공단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좋지 않았던 시계 업황과 관련이 있습니까.
"로만손은 굳이 개성공단에 입주하지 않았어도 됐어요.
중국과 스위스 부품 공장들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 시계업계 인프라가 붕괴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8개 협력업체들과 함께 간 것입니다.
국내 산업 기반이 무너지면 결국 우리도 힘들어지기 때문이지요."
#산업은행서 엔화 빌려 개성공단 입주
-개성공단기업협의회장을 맡고 있는데 개성 관련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우여곡절도 많았지요.
당시 수출입은행에서 개성공단 입주 자금을 지원해 준다고 해서 갔더니 완전히 소설책 한 권을 써 오라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 후에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해서 자금이 이렇게 저렇게 될 것 같다고 적어 오라는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쓸 수는 없고.그동안 거래해 온 산업은행에서 대출받겠다고 했더니 통일부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그래서 담당 국장에게 쏴붙였지요.
'남북경협기금 안 쓰고 스스로 자금을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많냐'고.결국 수출입은행 원화 자금 대신 산업은행에서 엔화 자금 빌려서 개성공단에 들어갔어요.
당시 100엔이 950원이었는데 지금 760원쯤 하니까 원금을 갚고도 돈을 많이 번 거지요."
-중앙회장 취임 후 회사 경영은 동생(김기석 사장)에게 맡겼는데.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을 체질적으로 좋아해요.
식구든 직원이든 능력에 맞게 자리를 배치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왔습니다.
동생도 그런 원칙에 따라 맡긴 것이고 지금까지 경영 성과를 보니 잘하고 있습니다.
중앙회장을 맡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게 인사입니다.
외부에서 누구누구를 봐 달라는 인사 청탁이 막 쏟아져 들어오더군요.
선거에서 '김기문 편'을 들었으니 감안해 달라는 거예요.
내부 직원들에게 우회적으로 몇 번 경고했는데도 끊이지 않더군요.
'이러다간 판을 망치겠다' 싶어 중앙회에서 두 번째 직원 조회를 하던 날 아예 '1년 뒤에 능력에 따라 인사를 하겠다'고 못박았습니다.
지난달 인사를 하긴 했지만 소폭이었습니다."
-둘째 딸이 미국에서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다는데 후계자 경영 수업을 시키는 것인가요.
(김 회장은 딸 둘을 두고 있으며 장녀는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
"둘째 딸은 지금 미국에서 취직할 곳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 어려울 것 같은데요.
가업을 승계하는 것도 좋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회사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업 오너의 2세나 3세나 그렇게 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앉히면 그건 문제가 되지요.
회사를 잘 경영하고 오래도록 지속시킬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경영권을 물려 줄 생각입니다."
-중앙회장 임기 중에 회사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닥친다면.
"내 본업은 어디까지나 로만손 대표입니다.
내 손으로 일군 회사라서 애정이 각별합니다.
중앙회장 업무가 중요하긴 하지만 로만손이 힘든 상황에 빠진다면 회사 사무실로 달려가야겠지요."
정리=송태형/이상은ㆍ사진=강은구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