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 정권이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작년 9월 63%라는 전후(戰後) 세 번째로 높은 지지율로 출범한 아베 신조 내각.그러나 1년도 안된 지금 지지율은 반토막이 났다.

각료들의 부정 스캔들에 지난 수십 년간의 연금 기록 관리 부실까지 드러나면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다음 달 참의원(상원 격) 선거에선 여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마저 불투명한 상황.자민당 내에선 '포스트 아베(아베 이후)' 얘기가 고개를 들 정도다.

전후 세대의 대표주자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아베 총리는 과연 '실패한 총리'로 쓸쓸히 퇴장할 것인가,아니면 난관을 돌파해 재도약하는 저력을 보일 것인가.

이는 다음 달 22일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국민들이 보여줄 '민심'에 좌우될 전망이다.


◆사상 최악의 지지율

지난 3일 낮 도쿄의 시부야역 앞.아베 총리가 오랜만에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연금 기록 문제 때문에 국민들의 불안이 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의 책임자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행인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 아베 총리는 정부의 연금 기록 누락을 사죄하며 관리 대책을 목이 쉬도록 설명했다.

그러나 귀담아 듣는 시민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일본의 유력지인 아사히신문은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정권 출범 후 최저치인 30%로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아베 내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5월 말 조사 때의 42%에서 49%로 올랐다.

국민의 절반이 아베 내각에 등을 돌린 것이다.

지난 9~10일 아사히신문이 조사한 정당별 지지도는 더 심각했다.

그동안은 아베 내각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해서 최대 야당인 민주당 지지율이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민주당에 대한 국민 신뢰도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선 민주당 지지율이 급등해 처음으로 자민당을 앞질렀다.


'지금 참의원 선거를 한다면 어느 당을 찍겠느냐'는 질문에 자민당은 23%인 반면 민주당은 29%였다.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당수가 '생활 유신'이란 기치를 걸고 연금 부실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결과다.


◆연금 5000만건 누락

아베 내각의 인기가 급락한 건 지난달 불거진 '연금 기록 부실 관리' 문제 탓이다.

직장인들이 가입한 후생연금과 자영업자 등이 가입한 국민연금을 1997년 통합해 가입자들에게 하나의 기초연금번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5000만여건의 연금 기록이 주인을 찾지 못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1979~1989년 사회보험청이 연금 기록 서류를 전산화할 때 이름이나 생년월일 등을 잘못 입력해 엄청난 납부 기록의 주인이 없어져 버렸다는 얘기다.

5000만여건의 납부 기록이 '공중에 떴다'는 건 그 돈을 낸 사람들 입장에선 '미납(未納)' 처리됐다는 것이고,나중에 그만큼 연금을 덜 받게 된다는 뜻이다.

정부를 믿고 노후를 위해 수십 년간 꼬박꼬박 연금보험료를 내온 국민들이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최근엔 5000만여건의 '주인 없는 기록' 외에도 1430만건의 연금 납부 기록이 전산화 당시 아예 입력조차 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파문은 커지고 있다.

특히 연금 기록 부실 관리 문제는 전통적으로 자민당을 지지해온 50~60대 이후 노년층의 이반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연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노년층들은 자신이 내온 연금보험료를 정부가 엉망으로 관리했다는 데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 배신감은 자민당 정권에 대한 불신임으로 표출되고 있다.


◆비리 농수산상 비호 파문

아베 총리의 인기가 바닥을 기는 또 하나의 배경은 그가 정치 개혁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들은 전후 세대인 아베 총리가 취임할 때 참신성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혼탁한 정치문화를 어느 정도 개혁할 수 있는 인물로 봤다.

그러나 정치 개혁은커녕 구태 정치의 틀에서 못 벗어난 아베 총리의 모습에 일본 국민들은 실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달 28일 자살한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 사건.6선 의원인 그는 자신의 정치자금관리단체 사무실을 임차료 없는 중의원회관에 두고도 5년간 매년 2000만엔(1억6000만원)씩 사무실 임대비용을 허위 계상했다.

부당한 정치자금 의혹이 명백했지만 아베 총리는 마쓰오카 농수산상을 감싸고 돌았다.

그가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 때 '아베를 둘러싼 의원모임'을 조직해 활약하는 등 공신이었기 때문.검찰 수사망이 좁혀지자 마쓰오카 농수산상은 결국 자살이란 극단적 해결책을 택했지만,그 유산은 아베 총리에게 남았다.

마이니치신문은 사설에서 "마쓰오카의 비극적 결말은 총리가 정치자금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경시해 조속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탓"이라고 비판했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도 69%의 유권자는 마쓰오카 농수산상을 끝까지 감싸고 돈 아베 총리에 대해 '적절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벌써 '포스트 아베' 거론돼

다음 달 22일 참의원 선거를 한 달여 남겨둔 자민당은 요즘 뒤숭숭하다.

총 242석의 참의원 중 절반인 121석을 교체하는 이번 선거에서 공동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과반수 의석(121석)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어서다.

아사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 아사히'의 판세 분석에 따르면 공동 여당은 기존의 137석 중 20석을 잃어 117석에 그치고,민주당과 군소 야당이 125석을 차지할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경우 아베 총리는 정권 구심력을 잃어 퇴진 압력을 받을 것이라는 게 정가 관측이다.

1998년 지지율이 30%로 떨어진 상태에서 참의원 선거에 패배해 퇴진했던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얘기다.

벌써부터 자민당 내에선 '포스트 아베'를 겨냥한 거물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유력한 총리 후보 중 한 명인 아소 다로 외상은 지난 5일 도쿄시내 호텔에서 자신의 계파 정치자금 모금 파티에 처음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최근엔 자신의 정치 철학을 소개하는 자서전을 내고,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나서는 등 '노출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다른 계파로부터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부탁도 쇄도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선 아베 총리가 아닌 아소 외상이 '자민당의 얼굴'로 나서야 승산이 있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온다.

'아름다운 나라 건설'이란 근사한 구호를 들고 나와 평화헌법 개정 등 거창한 공약을 준비했던 아베 총리는 뜻도 제대로 못 펴보고 낙마 위기에 몰리고 있는 셈이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