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오면 나는 도깨비처럼 생긴 공산당을 멸공(滅共) 망치로 내리치던 반공 포스터와 유월 항쟁의 함성,그리고 삼풍백화점을 떠올린다.
삼풍백화점.그때 그 사고로 내 친구는 언니를 잃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뒷집의 그 언니는 네 자매 중 맏이였다.
똑같은 모양의 교복이라도 허리가 잘룩한 그 언니가 입으면 달라도 한참 달랐다.
멋을 낸다고 발목 양말을 한번 더 접어 복사뼈가 살짝 드러나도록 신곤 했는데 어린 내 눈에도 하복을 입은 그 뒤태가 예뻤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500여명이 사망하고 900여명이 다쳤다.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 언니는 목숨을 잃었지만 기적처럼 구조된 사람들도 있었다. 사고 11일 만에 구조된 최군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가게의 주인은 처녀적부터 나와 알고 지내던 사람이어서 하마터면 최군 대신 우리 막내가 그곳에서 일할 뻔했었다.
무슨 일로 막내가 그곳에서 일하지 않게 된 것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우리 가족은 지금도 삼풍 사고를 떠올릴 때면 머리부터 절레절레 흔든다.
만약 그때 그 시간 막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막내에게도 최군과 같은 행운이 뒤따랐을까.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막내는 행운아다.
밤 늦은 귀가로 늘 어머니의 마음을 졸이게 했지만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을까,어머니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름 수련회에 갔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지만 오히려 그 경험 때문에 악착같이 수영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나도 행운아였다.
수학 여행부터 시작해 숱하게 관광 버스를 탔고 부주의하게 안전 벨트를 매지 않은 적도 몇 번이나 된다.
하지만 가벼운 교통사고 한번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민방위 훈련 중 5층 교실에서 운동장까지 연결된 구명 부대를 타고 내려왔지만 팔꿈치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내가 탄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버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잠깐 기절한 적이 있기는 하다.
병원 간호사가 집 전화번호를 대라는데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남학생들 앞에서 '스타일 다 구겼다'라는 생각은 했으니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사고로부터 십수 년이 흘렀다.
사고 몇 년 뒤 소설 속의 배경이 삼풍백화점이었다는 이유로 그 현장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건너편 고층 빌딩에서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흉물스럽던 건물 잔해는 치워지고 텅 빈 공터에 포클레인 몇 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언제 그런 참사가 있었냐는 듯 초고층 빌딩이 우뚝 서 있다. 하지만 그곳엔 한때 대형 백화점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 건물이 거짓말처럼 폭삭 무너졌다. 나는 더이상 내가 살고 있는 건물과 내가 드나드는 건물들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에는 자동차가 다리 한가운데 서 있게 되면 초조해진다.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씨랜드 참사는 또 어떤가. 나는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늘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행운의 여신이 언제 내 어깨에서 떠날지,어머니의 기도도 언제까지 '약발'이 들을는지 알 수 없다.
소방 훈련에 참가한 엄마들이 굴절 사다리차에서 떨어져 추락사하고 지리산 체험 학습을 다녀오던 버스가 언덕 아래로 굴러 중학생 다섯 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학생은 죽은 친구 앞에서 나만 살아 미안하다면서 오열했다.
안전 불감증이 만연한 이 나라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목숨을 운에 맡겨두고 있다.
운이 좋으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갈 것이다.
나는 방어 운전하듯 조심조심 삶의 핸들을 잡는다.
그 언니에겐 어린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도 자라 어느덧 사춘기 소녀가 되었겠다.
백화점 사고 이후 그곳에 가게를 가지고 있던 지인(知人)은 하는 일마다 꼬이더니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처럼 내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해마다 유월이 되면 나는 반공 포스터와 유월 항쟁과 삼풍백화점을 떠올린다.
반짝 희디흰 발목 양말 위로 돋아오른 그 언니의 복사뼈가 눈에 보이듯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