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해질 무렵 서울 서대문 사거리 근처의 한 허름한 보신탕 집에서 김정만 LS산전 부회장을 만났다.

환갑을 앞둔 그가 '특별히' 정한 장소이겠거니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술잔을 마주하고 앉아 "보신탕을 즐겨 드시나 봅니다"라고 말을 건넸더니 사실은 거의 먹지 않는다며 보신탕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 부회장의 부모님은 불교 신자였다. 목에 탯줄을 감고 태어난 그에게 부모님은 "보신탕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일종의 미신 같았지만 그 말을 지켜오다가 몇 년 전 직원들을 따라 처음 보신탕집에 갔단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배탈이 나 차를 세우고 호텔 화장실로 뛰어가야 했다. 이만하면 '보신탕집' 인터뷰는 마다했을 텐데 그는 다르게 말했다.

"싫든 좋든 자신이 처한 현재는 기회나 마찬가지예요. 다시 오지 않는 기회를 위해서라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이 음식도 이 순간에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작은 의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겠죠."

▶▶▶한경 기자들과 6시간 솔직 토크


# 방황을 딛고…

김 부회장은 자기 병원을 가진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의대 진학의 꿈은 여의치 않았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3년을 방황하다 결국 부산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방황했던 3년을 가리켜 "인생의 암흑기"라고 말했다.

'3년간 어떤 어려움이 있었기에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이래저래 방황했다"는 짧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다는 점"이라며 손사래를 치다 결국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이발을 하셔야 하는데 집에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머리를 제 손으로 깎아 드렸습니다. 그래도 대학은 갈 수 있었어요. 집안 형편이 좋으셨던 고모님이 지원을 해주셨거든요."

당시 사립대의 등록금은 국립대의 세 배에 달했다.

부산대에 들어갈 때 등록금은 3만원 정도."대학 가면 양복을 한벌 사 입잖아요.

그런데 형편이 안돼 고모가 사주셨어요." 태어나 처음 입은 양복을 고모로부터 얻어 입어야 했던 일을 그는 두고두고 기억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정만은 도서관을 지키는 모범생이었다.

도서관 옆자리에 앉은 '법대 여학생' 외에는 낯익은 사람이 없었다.

허비한 3년의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에 공부에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3년 LG화학에 지원했다.

"부산에서 가깝고 좋지 않느냐"는 부친의 말에 LG화학을 택했다.

LG화학에 입사해서 자신의 적극적인 성격에 맞는 영업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일은 재무였다.

# 세법을 통달하다

스스로 소질이 없다고 여긴 재무쪽 일을 맡은 뒤로는 이를 악물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친구들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문가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세법책을 사다가 손에 쥐기 좋게 토막을 냈다.

그리곤 무조건 외우기 시작했다.

세제 관련 법령이 왜 수시로 바뀌는지,그 배경까지 통달하게 되자 어느덧 재무통이 되어 있었다.

결혼을 했지만 '가정'과 '일'을 똑같이 잘할 수는 없었다.

'일에 살고 일에 죽기로 했다'며 아내를 설득했다.

인터뷰에 따라왔던 직원이 "부회장님은 정말 휴가 한번 안 가신 일벌레였다"고 귀띔했다.

그는 "LG화학에 들어가서 부장을 달기까지 10년간 휴가를 한번도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입사 후 10년 만에 부장 직책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휴가를 반납하고 일을 한 덕택에 "셀 수 없을 정도로 특진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한번은 장모님이 집에 오셨어요.

옛날엔 컴퓨터가 없어서 전부 손으로 써야 했거든요.

결산 때가 되면 밤을 샐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하도 집에 안 들어오니까 장모님이 아내에게 '야,이상하다.

김서방이 바람이 났나보다.

아침 일찍 전화해 봐라'이런 거예요.

다음 날 아내가 전화를 걸었는데,내가 용케 받아서 겨우 오해가 풀렸던 일도 있었죠.그때가 아마 1975년도였을 거예요."

부장이 된 뒤 LG화학의 울산공장으로 내려가면서 첫 휴가를 냈다.

큰 마음먹고 자동차도 마련했다.

가족을 태우고 울산에서 제일 가까운 경주에 들렀다가 남해안을 일주했다.

김 부회장은 "그간 서운해 하던 아내가 굉장히 고마워하더라"며 웃으며 말했다.

# 'LS산전을 구하라'

LG화학 CFO(재무담당 최고경영자·부사장) 시절이던 1999년,LS산전(당시 LG산전)의 구조조정을 지휘하라는 그룹의 지시를 받고 회사를 옮겼다.

당시 LS산전은 순차입금만 1조5456억원,부채비율은 무려 1368%에 달했다.

"회사 정리를 하려면 대개 스태프를 데리고 오는데 저는 혼자 왔거든요. 무지하게 어려웠어요. 사람 습관이라는 게 무서워요. 변화하길 싫어하고 안주하길 원하잖아요. 산전에 온 지 벌써 8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구조조정을 하러온 김 부회장을 LS산전 임직원들이 반길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임원들마저 그가 부실사업을 정리하는 걸 두고 '설친다'고 했다.

어떤 이는 면전에서 "여기는 LG화학이 아니다.

산전이다"라며 눈을 부릅뜨기도 했단다.

하지만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내야 했다.

"저만 쳐다보고 있는 눈이 5600개가 되는데 밤에 잠도 안 오더라고요. 2시간마다 깨곤 했어."

2001년 사장이 됐을 때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영업전략을 바꾸기로 하고 임직원들을 설득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나름대로 기술 관련 공부도 많이 해둔 상태.하지만 반발이 심했다.

고참 간부들은 등 뒤에서 김 부회장을 비난했다.

"돈 만지는 사람이 영업까지 가르치려 든다"느니 "제품도,기술도 모르는 사람이 나서는 걸 보니 이제 우리는 망했다"고 푸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수록 더욱 이를 악물고 기술트렌드와 제품 공부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봐요. 우리는 독점이니까 일본에서 기술만 들여와 물건을 만들어 팔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궁극적으로 기업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앉아서 영업하는 건 영업이 아니죠.대리점 사장 30년 해봤자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앉아서 하는 영업은 집어치워라.고객을 찾아다니면서 팔아야 된다'고 했죠."

그로부터 3년쯤 지나자 조직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임직원들도 김 부회장의 뜻이 옳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나섰다.

김 부회장은 업무 처리에 있어서 깐깐하기 짝이 없다.

전자태그(RFID) 신사업팀을 꾸렸을 때의 일이다.

직원이 올린 사업계획서를 "부족하다"며 돌려보낸 것이 28번.결국 29번 만에 'OK'를 해줬다.

"문제가 되는 것을 그냥 못 둡니다. 항상 바꾸라고 이야기하니까 직원들은 굉장히 고달프지요."

직원들에게 미안할 법도 하다.하지만 그는 "그래도 모른 척하고 끝까지 버텼다"고 털어놨다.

# 월급쟁이 34년의 꿈은

오너가 있는 기업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성장하는 일은 쉽지 않다.

김 부회장은 LS그룹 CEO 가운데 유일한 전문 경영인이다.

그는 "LS그룹(오너)분들은 굉장히 겸손하다"고 말했다.

"홍 회장님(구자홍 회장을 그는 '홍'회장님으로 불렀다)을 한 달에 한 번씩 정책간담회서 뵙는데 정말 대단하신 점은 일을 한번 맡겨 놓으면 전혀 간섭을 안 하세요.그래서 책임감을 더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로 월급쟁이 생활 34년째인 그는 무뚝뚝하다 싶을 정도로 남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편이다.

김 부회장은 "특별한 백그라운드(배경)가 없는 나에게 유일한 방법은 노력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가 부회장이 된 것은 지난해 12월.남들이 선망하는 자리까지 올랐으니 좋을 법하지만 그는 "기껏해야 봉급이 조금 올라가고 차가 달라지고 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회사 생활 34년 중 가장 기분 좋았던 기억으로 '특별 보너스'를 받던 때를 꼽았다.

명절이 되면 상사로부터 특별보너스가 내려왔다.

남들은 받지 않는 봉투를 혼자만 받는 것이 미안해 화장실로 달려가 봉투를 열어봤다.

돈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돈보다는 기분이었다.

그는 "명절을 앞두고 고향인 부산에 먼저 내려가 있는 아내에게 특별보너스를 받았다고 전화로 소곤소곤 말하면 무척 좋아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 부회장은 "월급쟁이로는 부회장이 끝"이라면서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LS산전이 지난해 연구개발(R&D)에 쏟은 돈은 582억원.해외 선진 기업들이 매출액 대비 2% 정도의 투자를 하는 데 반해 LS산전은 매출액의 4.8%를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그 돈을 아끼면 내 실적이 될 수도 있겠지.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면 내 실적은 포기해도 괜찮다"며 웃었다.

김 부회장은 술자리를 마감하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기자들도 월급쟁이 생활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 자신의 얘기를 참고하라는 취지였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친구 때문에 회사가 잘됐다'고 하면 그게 월급쟁이 최고의 기쁨 아니겠어요? 사실 월급쟁이는 그런 명예로 사는 거요."

# 러시아에서 배운 음주기법

인터뷰 전에 찾아본 두 페이지 분량의 프로필에는 '술을 잘 못한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비즈니스 음주'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원칙을 갖고 있었다.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는 "나랑 잔을 부딪히면 원샷을 해야 한다"며 잔을 비울 것을 권했다.

김 부회장은 러시아 바이어들과 함께했던 술이야기를 들려줬다.

해외영업처를 뚫기 위해서는 술자리가 필요한 경우가 허다하다.

러시아 바이어들도 자주 만났다.

보드카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라 그의 말을 빌리면 '몸을 던져서 마셔야 한다'. 하지만 예의는 반드시 갖춰야 한다.

"술자리에 나가 보면 우리 멤버가 4명이고 상대방은 둘이 나와요. 그런데 한 사람이 전력청장쯤 되면 같이 나온 다른 사람은 비서 비슷한 위치죠.그럼 그 사람은 술을 못 마시잖습니까. 결국 청장 혼자서 우리쪽 네 사람을 상대하는 셈인데 혼자만 취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이 '원샷'을 하면 다 같이 한다"라는 원칙을 세웠다.

취하더라도 다 같이 취해서 서로 믿음을 주자는 것이다.

만난 지 4시간이 지났는데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맥주라도 한잔 하시자"며 소매를 잡아 끌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뜻밖이다.

"맥주는 배가 불러 이제 못 먹어요.차라리 독주를 마십시다."

인근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를 부탁했다.

마이크를 잡더니 김범수의 '보고싶다'를 멋들어지게 부른다.

앵콜 두 번에 애창곡인 김광석의 '사랑했지만'도 들을 수 있었다.

"연세가 있는 만큼 요즘 가요를 소화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 젊은 사람들보다 더 잘 부르신다"는 심사평에 김 부회장은 "나이가 들었다고 옛날 노래만 부르는 건 안 돼.그것은 자신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거고,노력을 안 한다는 거죠"라며 젊은 기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글=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