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드플래시메모리를 2.5t짜리 트럭에 가득 채우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무려 2000억여원이다.

트럭 한 대분의 가치가 이 정도에 달하는 공산품은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음놓고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반도체를 팔아서 번 달러 덕분"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반도체는 우리나라의 수출 주력제품이다.

하지만 세상에 저절로 팔리는 제품은 없다.

반도체 시장은 '대박'과 '쪽박'이 한순간에 판가름나는 살벌한 전쟁터다.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경쟁사보다 더 팔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영업이 안되면 재고가 쌓이고,재고 누적은 가동률과 시장점유율 하락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서류가방 하나 챙겨 들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반도체 영업맨들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최지성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이 1980년대 유럽에서 반도체 영업을 하던 시절,1000쪽에 달하는 이론서를 달달 외웠을까.

오늘날 한국 기업들이 미국과 일본 업체를 따돌리고 '반도체 코리아'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도 반도체 영업맨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양사의 해외 마케팅을 주도해온 인물들이 잇따라 외국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돼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하이닉스의 A부사장이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교도소에 수감된 데 이어 삼성전자의 B전무가 조만간 같은 교도소에 수감될 예정인 것.두 사람은 1999∼2002년 미국 시장에서 D램 가격을 담합했다는 혐의로 미국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았다.

A부사장은 지난해 캘리포니아 법원으로부터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업무 인수인계를 이유로 복역을 미뤄오다 이달 초 수감됐다.

현재까지 D램 가격 담합과 관련해 실형을 선고받은 하이닉스 임직원은 총 4명.그 중에서도 A부사장은 글로벌 영업·마케팅을 총괄하는 핵심 역할을 맡아왔다.

특히 그는 중국 러시아 등 신흥시장을 개척하면서 하이닉스가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삼성전자의 B전무도 지난달 중순 징역 14개월형을 선고받고 다음 달 미국 내 교도소에 수감될 예정이다.

14개월형은 같은 사건으로 실형선고를 받은 삼성전자 임직원 6명 가운데 가장 긴 형기다.

B전무는 그동안 미국과 유럽 등지의 주요 거래선들과 대규모 반도체 공급계약을 주도했던 인물.특히 2005년 황창규 사장을 도와 애플컴퓨터와의 낸드플래시 대량 공급계약을 성사시키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해당 업체들은 회사를 위해 일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는 이들의 처지를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만 '어떤 보상이나 지원도 해줘서는 안된다'는 미국 법무부의 강경한 입장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회사의 수출 주역이 미국에서 고단한 수감생활을 한다는 점을 다른 임직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업계는 또 최근 일본과 미국 업체들의 추격이 거세지고 반도체 시황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실적개선의 선봉장 역할을 할 이들의 공백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D램 담합사건으로 실형선고를 받은 임직원들이 유럽과 미주 지역 핵심 마케팅 주역들이라는 점에서 회사에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