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다.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씨 부모가 사는 버지니아주 센터빌 교민들은 이번 사건이 한국 자녀들에 대한 보복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기업들은 브랜드 이미지 추락이나 제품 판매 감소 등의 악영향을 우려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센터빌은 한국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 한국인 거주 지역에 세워둔 차량 16대의 유리창이 깨졌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흑인들이 많이 사는 워싱턴DC에서는 조만간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어 현지 교민들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버지니아공대 기숙사에서 지내던 일부 동포 학생은 서둘러 짐을 싸 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을 우려해서다. 캠퍼스를 떠난 한 학생은 "집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지었다. 주미 대사관과 뉴욕 총영사관 등에서는 한적한 거리를 혼자 외출하지 말 것 등과 같은 지침을 교포 사회에 전달하고 있으며,각 지역 한인회와 각 학교 한인 학부모회도 이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통지하고 있다.

보스톤의 일부 한인상가는 역풍으로 인한 매출감소를 우려해 한글간판을 가리기도 했다.안전을 우려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가정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확인된 보복테러소식은 없었다.

일부 교민들은 "조씨가 한국 국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렸을 적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 미국 생활 기간이 훨씬 길었다"며 "미국 교육과 사회의 산물인 조씨로 한국인 전체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고 한숨을 지었다.

이민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종준 변호사는 "소수 민족인 한국인들이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려는 시기에 이러한 참사가 벌어져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며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 실추로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비자 면제 프로그램과 학생 비자 발급 등에 나쁜 영향을 줘 선의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 미국에 진출한 기업들은 이번 사태로 반한·혐한 감정이 조성될 경우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보고 미국 내 여론과 현지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는 등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현대·기아차는 현지 판매법인과 주재원들에게 안전에 유의하고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도록 당부했다.


회사 측은 이번 사건이 미국 판매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분석하면서도 차량 판매가 본격적인 성수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예기치 못한 악재가 터져나왔다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부진했던 미국 판매가 최근 살아나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삼성과 LG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01년 9·11 테러 당시에는 미국 법인이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대응했다"며 "일단은 사태의 추이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LG전자도 현지 분위기를 좀 더 파악한 다음에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삼성물산 지성하 사장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어 직원들에게 조심하라는 경계령을 내렸다"면서 "LA폭동 때 한국인들이 불합리하게 당한 경험이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미국 4개 지역에 타이어코드 공장을 두고 있는 ㈜효성 관계자는 "미국 굿이어사와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현지 상황에 따른 불이익은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허원순/이건호/안정락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