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 < 대구 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

나는 와인을 사랑한다.

와인에 많은 돈을 쓰지 않지만 꾸준히 마신다.

와인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름 외우기를 좋아한다.

남자들이 어묵탕에 소주 한잔 놓고 하루의 시름을 내장에서 털어낼 때,나 역시 잘 빠진 둔부 같은 투명한 와인잔에 핏빛 액체를 담아 하루의 시름을 녹여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와인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떫은 맛,쌉싸름한 맛,단맛,신맛,무거운 맛,가벼운 맛.와인들은 아주 미묘하게 다른 맛을 낸다.

마치 인간처럼 말이다.

시디 신 풍자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겸비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사이드 웨이'에는 와인에 살고 와인에 죽는 와인 마니아,마일즈가 나온다.

대머리에 번번이 퇴짜맞는 삼류 작가이지만 와인에 관한 한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열정을 지닌 마일즈는 어디서나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카베르네 품종보다는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정성과 섬세함이 담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피노 품종의 와인을 예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멜롯은 개성없는 와인의 대명사야,게다가 샤도네이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성을 잃은 와인이지." 이쯤 되면 와인이 인간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자칭 와인 애호가로서 아쉬운 점은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와인 값이 비싼 나라라는 것.남아프리카나 유럽에서 4000~5000원 정도만 주면 양질의 와인을 통째로 맛볼 수 있는데,국내에서 산 같은 가격의 와인은 꼭 '복잡한 버스 안에서 듣는 모차르트' 같다.

와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생각하는 영화,칸 영화제에서 보았던 와인 다큐멘터리 '몬도비노'가 떠오른다.

와인학자이기도 한 감독 조너선 노시터는 와인에 관한 다큐에서 와인 브랜드 중 가장 유명한 몬도비노 회사 관계자들의 인터뷰 중간 중간에 와인 생산을 하늘로부터 받은 '소명 (vocation)'으로 여기는 프랑스의 꼬장꼬장한 노인 에메 귀베르의 인터뷰를 끼워 넣었다.

세련된 양복 차림의 와인 생산업자의 그럴듯한 수사보다는 프랑스 노인의 순박한 장인정신이 와인이라는 신의 물방울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메 귀베르와 남아프리카에서 보았던 검은 손의 순박한 농부들 때문에 이 시간에도 나는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주말 저녁.나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남편을 위해 몬테스 알파 한 병을 준비하리라.그리곤 마주한 이에게 빅토르 위고가 했다는 이 말도 놓치지 않고 건네리라.'신은 물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와인도 만들었다.'

오래돼 익어 버린 와인 한 잔.그렇다.

와인을 마시다 보면 와인에 취한 것이 아니라,내가 살아있음에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