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대 가전업체인 비디오콘이 대우일렉 인수 우선 협상자로 선정된 지난해 9월 업계에서는 '헐값 매각' 논란이 불거졌다.

국내 3위의 가전업체를 6000억원대의 가격에 팔아도 되느냐는 지적이었다.

1998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이 회사에 채권기관이 그동안 투입한 돈만 해도 1조2000여억원에 달한 터였다.

그러나 정작 회사 안에서는 헐값 매각 논란보다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더 컸다.

이승창 사장도 "1만건의 특허 관련 기술이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대우일렉은 프리미엄 제품 기술을 확보해 인도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의 생산시설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비디오콘에는 매력적인 회사"라며 "기술만 빼가고 투자하지 않는다면 국내에 남겨질 대우일렉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재 매각 작업은 가격에 대한 시각차로 답보 상태에 빠져 있다.

지난해 프랑스의 아르셀로를 인수·합병(M&A)하면서 세계 최대 철강회사로 올라선 인도의 아르셀로미탈이 포스코에 대한 M&A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이유도 '기술'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한 번도 제철소를 짓지 않고 덩치를 불려온 이 회사가 지난 16년간 인수한 17개 기업은 아르셀로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멕시코 루마니아 카자흐스탄 중국 알제리 등 철강 후발국의 중소 규모 회사들이다.

양대천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아르셀로미탈이 포스코에 관심을 보이는 있는 것은 덩치를 불리려는 목적도 있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설비·공정 기술력을 탐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미탈은 아르셀로 인수 당시 산업스파이를 침투시켜 재무정보,M&A 방어 전략,자사주 매입 예상가 등을 입수해 프랑스 정부와 여론의 반대를 뚫고 '거물'을 삼키는 데 성공할 정도로 첩보전에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의 해외 매각 때마다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우려는 중국 상하이자동차그룹에 팔린 쌍용차와 비오이그룹에 넘어간 하이디스의 사례를 보면 기우로 치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003년 TFT-LCD 업체인 하이디스를 4000억원에 인수한 비오이그룹은 LCD 관련 기술인 엘시디광시야각 분야 핵심 기술(AFFS) 등의 이전을 요구하다 노조의 반대로 무산되자 법정관리를 신청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수년간 100명 이상의 연구원들이 비오이에 파견돼 공동연구를 진행한 터라 상당한 양의 관련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2004년 쌍용차를 5900억원에 인수한 상하이차그룹도 쌍용차를 독자 브랜드 신차 개발을 위한 '기술보급소'로 활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05년 봄 카이런 출시 전부터 현지에 파견한 연구원들을 통해 각종 부품 등 신차 관련 도면이 유출됐고 이후 업체 조사 명목으로 1000여종이 넘는 도면이 빠져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차는 지난해 6월 뒤늦게 상하이차와 이른바 'L-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하고 중국 현지에 엔진공장을 짓고 '카이런' 디젤모델을 생산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의 라이선스 계약 금액은 240억원.카이런 연구개발비가 2500억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당시 노조는 "국내 투자 없이 L-프로젝트를 중국에서 벌이면서 SUV 생산기술을 빼내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류기천 경영연구팀장은 "쌍용차 M&A와 기술 유출은 결국 상하이차가 독자 브랜드로 신차를 개발해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을 추격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2∼3년 단축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내 기업의 기술이 결국 M&A를 통해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정무영 쌍용차 홍보부장은 "기술이전 계약은 쌍용차가 중국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추진된 것으로 공정한 계약에 의해 진행된 글로벌 경영활동이라는 법적인 판단도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외자유치는 언제나 선(善)'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매각을 통한 기술 유출도 문제지만 국가 전략산업을 적대적 M&A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병석 한나라당 의원 등은 '국가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 투자 등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다.

이 법안은 외국인 투자자가 '국가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업'의 지배권을 취득하려 할 경우 정부가 조사한 뒤 의결권 정지,주식 처분 명령 등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이 법안에 소극적인 편이다.

충북대 법대 송종준 교수는 "선진국들은 자국의 안보와 관련한 산업에 대한 보호장치를 두고 이미 이를 광범위하게 해석해 적용하고 있어 우리가 비슷한 장치를 둔다고 해도 문제될 게 없다"면서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의 경영권은 국가의 '전략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법을 정비해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부=김수언/주용석/류시훈 기자 indep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