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 기자들과 6시간 솔직토크

이력서만 보면 그는 '마초(힘이 세고 남자다운)'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거친 남성임에 틀림없다.

합기도와 복싱으로 심신을 단련한 '35년 바다 사나이'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껏 '제대로' 취해 본 적이 없다는 주량은 또 어떻고….하지만 실제 모습은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단정한 옷 매무새와 날카로운 눈매는 '우람한 몸집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대했던 기자들의 환상을 깨뜨렸고,따뜻함이 배어나는 정겨운 말투에서 '뱃사람'의 투박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박식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술 실력뿐이었다.

박 사장의 지칠 줄 모르는 주량 탓에 오후 7시께 광화문의 한 대중음식점에서 시작한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들과의 만남은 다음 날 오전 1시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 나는야 바다 사나이

-오랫동안 해운업에 종사해 왔는데 바다를 두려워해본 적은 없나요.

"무섭지 않으니까 해운회사 CEO(최고경영자)를 하죠.어떤 직종이든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와 두려움이 생기잖아요.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거기서 끝이죠.실패를 두려워하면 절대 성공할 수 없어요.그렇다고 실패를 숨기거나 남한테 떠넘기려 하면 계속 실패만 반복하게 돼요.그런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즐겼다고 해야 하나? 그럭저럭 잘 극복했던 것 같아요."

-해운업계 사람들은 술을 잘한다면서요.주량은 어느 정도세요?

"음….'먹는 만큼'이 주량이에요.아직 정신을 잃도록 취해본 적이 없어서….요즘은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아요.그래도 소주 2병은 먹지."

#격투기가 가져다 준 도전정신

-격투기를 많이 배우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린 시절 자전거를 자주 탔는데 한 번은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 내 자전거를 빼앗아 달아나는 일이 벌어졌어요. 한참을 쫓아가 붙잡은 뒤 옥신각신하는데,한 대학생 형이 자초지종을 듣고 해결해줬어요. 그때 자전거를 빼앗은 사람은 지금은 이름만 대면 다들 알 만한 대기업 CEO가 되셨죠.그때는 미웠는데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더라고요. 지금은 아주 친해져서 가끔 술 한잔씩 하고 그래요. 제 인생의 멘토랄까. 정신력이 워낙 강인한 사람이어서 '저 형을 이겨야지'라고 이를 악물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튼 그때는 그 형을 혼내주려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권투 도장에 다녔죠.당시만 해도 권투도장에는 선수 지망생이 많았어요. 엄청 맞았는데 아프지가 않아요. 오히려 맞을수록 '저 놈이랑 다시 붙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심히 했더니 관장이 '너 권투선수 될 수 있어.키워 줄게'라고 할 정도까지 되더군요."

-어린 시절의 권투 경험이 사장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꼭 이기고 싶다는 신념이 생기더라고요. 공정한 사각의 링에서 실력으로 맞붙는 묘미도 알게 되고.이런 게 사회생활 하는데 많은 자극제가 됐어요. 제가 뭐 하나에 심취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인데 아마 그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생긴 도전정신은 업무할 때도 큰 도움이 됐어요."

-고등학교 때는 합기도를 했다고 들었어요.

학창시절에 '한 주먹' 하셨겠어요.

"운동을 하다 보니까 싸우지는 않더라고요. 정식 대련은 가끔 했지.대학 때는 유도 유단자와 대련하다 혼나기도 했어요. 군대에서는 태권도 교관을 했고."

-중·고등학교 때 운동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으셨겠어요.

"학창시절에 '3·3·3'을 달성했죠.합기도 3단에 당구 300,바둑 3급이었으니까. 허허.하지만 공부할 때는 열심히 했어요. 절도있는 생활이 좋았으니까."

#군인의 길,꿈을 접고 해운업계로

-군복무는 어떻게 하셨어요.

"ROTC 6기예요. 군대에서 표창도 많이 받았죠.제가 있던 부대에서 소위로 중대장을 역임한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중위 제대 무렵에는 부대장이 장기 복무 추천을 하더군요. 내 생각에도 절도 있는 군대생활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았고.고민 좀 했지요.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해군사관학교에 가는 게 목표였으니까. 사관학교에 가려고 이과를 선택했고,담임도 '넌 운동도 잘하고 의협심도 있으니 잘 생각했다'며 OK 했었는데….결국 부모님 반대로 접었어요. 사관학교를 포기한 뒤 후회를 참 많이 했어요."

-그래서 공대를 가셨나요. 그런데 한진해운에는 어떻게 들어갔지요.

"원래는 제대하고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미국 대학의 입학허가까지 받아놨죠.그러던 중 신문에 난 '해운공사 신입사원 모집공고'가 내 인생 항로를 완전히 바꿨어요. 당시 7명 모집에 10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였어요. 입사 후 3개월 동안 승선 교육을 한 뒤로는 유학의 꿈은 집어치웠죠.해운업이 너무 좋았거든요."

-어떤 점이 좋았나요.

"그때 재래선을 타고 꼬박 3개월 동안 일본과 미국의 주요 항만을 들렀어요. 바다에서 선원들과 생활하는 것,수출입 화물 선적하는 것 모두 좋았어요. 절도 있는 생활방식도 맘에 들고.완전히 매료됐죠."

-이과 출신이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인문계 출신 동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해운 공부를 본격적으로 했죠.아마 저만큼 해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해운 관련 보험,신용장 통일 규칙,각국 선적 양하 규칙 등 웬만한 것은 달달 외웠거든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란 말이 있잖아요. 쉬지 않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한다는 얘기예요. 제가 그랬어요."

#절도 있는 생활,절도 있는 CEO

-사장님은 절도 있는 생활을 강조하시는데,요즘엔 유연한 CEO들이 각광받지 않나요.

"동감해요. 사실 저도 '보스' 스타일의 CEO는 아니거든요. 강압으로 직원들을 이끌지는 않아요. 오히려 감성에 호소하는 편이죠.그런 리더십을 갖기 위해서는 CEO부터 솔선수범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저는 대리,과장,부장 등 모든 조직원들이 '내가 리더다'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려고 노력해요. 모든 직원들이 '셀프 리더십'을 갖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리더,그런 사람이 진짜 리더 아닌가요? '내가 리더니까 날 따라 오시오'는 21세기형 리더가 아닙니다."

-사장님이 강조하는 절도는 어떤 것인가요.

"사람에겐 세 가지 리듬이 있어요.두뇌,마음,신체의 리듬.이 리듬에 따라 일과 휴식을 확실하게 구분짓는 것,이런 게 절도예요."

-그런 직원들이 많이 있나요.

"간혹 보이죠.저는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직원들을 참 좋아해요. 이런 사람들은 어느 조직에 가도 환영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와 상사로부터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재'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옛 속담에 '열두 가지 재주 있는 사람이 저녁거리가 없다'는 말이 있어요. 1000개의 아이디어가 있어도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별 무소용이란 얘기지요. 실행이 개인은 물론 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기회는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라,스스로 찾아야 하는 거예요."

-요즘 신입사원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실력은 좋은데 신념은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선배들이 조금 더 강하게 요구하면 100%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같아요. 특히 2~3년 만에 퇴직하는 신입사원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그래서 저는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부모님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부모님을 감동시켜 아이들을 붙잡으려고….허허.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이래도 그만둘 사람은 그만둬요."



#이상은 높게 마음은 넓게

-아드님도 '절도' 때문에 고생 좀 했겠어요. 어떤 철학으로 키우셨어요.

"'이상은 높게 마음은 넓게'예요. 이상을 높게 가지라는 건 신념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얘기이고,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건 남을 배려하라는 의미입니다.물론 몸은 항상 낮춰야죠.직원들에게도 많이 해 주는 얘기예요."(박 사장의 큰아들은 FDIC(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에서 근무하는 인재다.얼마 전 미국 아마추어 킥복싱 대회에 참가해 아버지를 걱정하게도 했다.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몸을 낮추기 힘들 때도 있잖습니까.참기 힘들 때는 어떻게 대응하셨어요.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잖아요.무조건 참아야죠.그래도 못 참겠다 싶으면 하늘을 올려다 보세요.그러면 별이 얘기해 줄 거예요."

-별이 어떻게 말을 합니까.

"그걸 들을 줄 알아야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용비어천가'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아 꽃과 열매가 좋고,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솟아나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기본과 진리에 충실하면 사회생활하면서 생기는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어요."

#해운업은 나의 천직

-사장님이 해운업계에 몸담은 35년 동안 회사는 해운공사에서 대한선주 한진해운으로 바뀌었는데,그동안 '나도 다른 일 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저는 해운업을 천직으로 생각해요."

-신입사원 때부터 CEO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나요.

"그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주인 의식을 갖고 일했어요. '언젠가 해운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긴 했죠.솔직히 지금도 '외국 선사들의 CEO보다 내가 낫지 않으냐'는 긍지를 갖고 있어요. 예를 들어 외국 선사 CEO들과 해운 항만 관련 시험을 본다든가,논문을 쓰라고 하면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자부심은 갖고 있어요."

-인생이 순탄하게 풀려왔던 것 같아요.혹시 '괴로워 죽겠다'는 순간도 있었나요.

"자라면서는 지는 걸 워낙 싫어해서 고민이 많았어요. 회사 들어와선 외환위기 시절이 제일 힘들었고요. 해운업이 자본 집약 산업이잖아요. 대형선 한 척에 1억달러가 넘으니까. 그런데 외환위기 직후 돈 꿔 주는 은행은 없지,정부 방침대로 부채비율 200%는 지켜야지,하는 수 없이 당시 갖고 있던 배 10여척 다 팔고 다시 리스백했죠.지금 그 배를 다 가지고 있으면 세계 3~5위권은 됐을 텐데.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아파요. 한진해운이 지금 세계 7위권에 머무르게 된 이유예요."

-세계 5위권 진입은 언제쯤 가능한가요.

"5년 뒤인 2012년에는 가능할 거라 확신해요. 그때 되면 매출 10조원에 영업이익 1조원도 달성할 겁니다. 외국 선사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차별화돼야 해요. 그냥 차별화로는 세계를 제패할 수 없어요. 완벽한 차별화를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어요."

-중국 선사들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데.

"거안사위(居安思危)란 말이 있어요. 편안할 때도 항상 위험에 대비하라는 뜻입니다. 사실 제일 무서운 상대가 중국이에요. 최근 들어 중국 선사들이 업그레이드된 선박을 앞세워 치고 나오고 있어요. 극복해야 될 과제입니다."

-해운업이 우리 국민성과 맞는 것 같습니까.

"그럼요. 한국 민족은 해양성이 굉장히 강한 민족이에요.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 아닙니까. 각자무치(角者無齒)란 말이 있어요. 뿔 있는 짐승은 날카로운 이가 없다는 얘기죠.한 사람이 여러 재주나 복을 다 가질 수 없다는 말인데,지하 자원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가 바다를 보듬고 있다는 게 바로 그런 예에요. 하늘이 준 선물이죠.한국이 경제 대국이 되고,국방 강국이 되기 위해선 해운업을 더욱 발전시켜야 해요. 전쟁 나면 한진해운 선박은 군함으로 개조되거나 군수 물자를 나르는 데 쓰입니다. 그래서 저는 직원들한테 '당신들은 누가 뭐래도 애국자다'라고 자주 얘기해요."

-해운업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것 같아요.

"당연하죠.사실 국가에서 볼 때도 해운업 만한 효자 산업은 드물어요. 해운업은 해운업 자체에 그치지 않고 다른 기간산업들을 일으키기 때문이죠.우리나라 조선 산업이 세계 최강이 될 수 있었던 건 해운업이 받쳐 줬기 때문이에요. 조선·항만이 발달하니까 연관 산업인 기계와 전기 산업도 발전하잖아요. 해운업은 정말 국가 기간산업으로 키워야 합니다."

#고(故) 조수호 회장에 대한 추억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님이 돌아가신 지 100일이 넘었습니다.

함께했던 추억이 많죠.

"20년을 모신 분이니 추억이야 많죠.출장도 많이 다녔고,조 회장은 한진해운을 세계적인 해운회사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굉장했어요. 세계 컨테이너 업계를 리드한 분이셨죠.회장님은 세계적 선사 대표들이 모인 국제 회의에서도 재미있는 유머로 좌중의 분위기를 주도하곤 했어요. 1990년대 초반부터 컨테이너 대형화를 외쳤으니 대단한 선견지명도 갖췄었고.개인적으론 제가 영업본부장 할 때도 힘과 용기를 많이 실어 주셨죠.참 배운 게 많습니다."

-한진해운 경영권 문제는 괜찮은 거예요.

"걱정 마세요,다들 투자하겠다는 건데요 뭐.한진해운의 미래가 밝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사실 새미 오퍼도 경영권에 관심 있는 게 아니거든요(이스라엘 해운 갑부인 새미 오퍼는 지난해 말 한진해운 지분 12.76%를 매입해 적대적 M&A 논란을 일으켰었다).한진해운과 제휴하자는 해운회사들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예요. 해운업계에서 선사 간 전략적 제휴는 필수예요. 하지만 스스로 국제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왕따'가 됩니다."

-앞으로도 최소한 5년은 한국 해운업계의 발전을 위해 힘써 주셔야죠.

"전 아직 젊다고 생각해요. 5년이 아니라 10년 정도는 어떤 형태로든 한국 해운과 항만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럴 각오도 돼 있고.다만 10년 후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거 할 거예요. 동양철학,동양의학 쪽에 관심이 많거든.지금 관련 책도 하나씩 모으고 있어요. 그건 10년 이후에 다시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합시다."

글=오상헌 기자/사진=김정욱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