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일은 공(公)과 사(私)일 뿐이다. 예전엔 일의 성패와 기미를 알기 쉬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알기 쉬운 것은 공(公)이고,알기 어려운 것은 사(私)다. 사람들이 제눈에 씌워진 콩깍지를 벗어버린다면 천하의 일 절반은 이미 이뤄진 것이다.'<'일득록(日得錄)'가운데 '공사분별'>

일득록은 조선조 22대 정조대왕(正祖大王,1752∼1800)이 독서하고 정사를 돌보는 도중 말한 것을 신하들이 기록해놓은 수상록이다. 정조는 조선조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방대한 내용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일득록은 그 가운데 정조의 개인적인 생각과 통치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의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고,세손으로 책봉된 뒤에도 끊임없는 암살 위협을 견디느라 새벽닭이 울 때까지 옷을 입은 채 공부했다. 학문에 정진하는 것으로 외로움과 두려움을 극복한 의지와 집념의 인물이지만 재위 중 다시 맏아들을 잃었고 병마로 개혁의 꿈을 다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군주로서의 치적은 실로 놀랍다. 탕평정치를 통해 붕당을 타파하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고 사회 통합 및 경제 개혁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세정(稅政)을 합리화하고,역대 왕릉 참배를 핑계로 궁궐 밖으로 나와 백성의 민원을 직접 듣고 처리했으며,과거제의 폐해와 신분 차별의 단서를 없앴다.

이런 정조가 우리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키워드로 등장하는 모양이다. 화성(華城) 건축에 걸었던 꿈과 포부를 다룬 창작뮤지컬이 공연되는가 하면 60부작 대하드라마를 비롯한 TV극이 제작되고 개혁정치와 당시 사회상을 다룬 영화도 잇따라 만들어진다고 한다.

정조대왕 붐의 요인은 한마디로 풀이하기 어렵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탁월한 리더십에 대한 사람들의 목마름 때문일 수도 있고,문화콘텐츠 소재로서의 적합성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이 모든 것들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치적을 보여주는'홍재전서'라는 자료와 이 텍스트를 쉬운 말로 풀어낸 인문학자들의 노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