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는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법률용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공판중심주의'가 한동안 화두(話頭)이더니 이제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이다. 유죄협상제도라고도 불리는 플리바게닝은 피의자가 유죄자백을 하는 대가로 검사가 불기소 또는 가벼운 죄명으로 기소하거나 낮은 구형을 약속하는 것이다. 피해액이 사상 최고라는 제이유그룹 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사가 피의자에게 거짓 진술을 강요하고 그 대가로 낮은 구형을 거래하는 비밀녹음이 공개되면서 다시 플리바게닝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검찰은 이 사건을 핑계 삼아 플리바게닝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부각시키려 애쓰고 있지만,여기저기서 미국 제도의 직수입에 부정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검찰의 시도는 5년 전에도 있었다. 검찰 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검찰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린 2002년 서울지검 피의자 고문 치사사건 직후에도 검찰은 재발방지 대책의 하나로 플리바게닝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검찰의 입장에서는 그 때 이 제도가 도입됐더라면 밀실에서 참고인이나 피의자를 협박하고 회유하는 지금과 같은 인권침해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진실을 발견해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검사가 거짓 진술을 강요하고 위증까지 권유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윽박질렀다는 점에서 플리바게닝과 무관한 불법수사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수사과정이 투명화되지 않는 한,그리고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인식하는 낡은 수사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플리바게닝이 도입되더라도 이러한 유(類)의 사건은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플리바게닝은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상 인정된 제도는 아니다. 그러나 불법 정치자금 수수나 뇌물사건처럼 자백 의존도가 높은 사건에서 선별적으로 수사협조와 자백의 대가로 입건유예,약식 기소,낮은 구형 등을 약속하는 수사관행은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사가 기소권을 무기로 은밀하게 플리바게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이러한 관행을 제도화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형 감면을 대가로 자백한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하는 사건만 집중적으로 수사해 공판심리에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플리바게닝이 공식적으로 도입되면 검찰이나 법원은 사건부담을 덜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수사와 공판을 중요사건에 집중하게 돼 사법체계의 유연성과 효율성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플리바게닝의 커다란 장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검사와 피의자가 벌이는 '형량 낮춰 줄게,자백 다오'식(式)의 협상이 우리의 법 감정에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진실발견을 포기하고 범죄자와 사법정의를 거래하는 것으로서 법치국가 이념에 반할 뿐 아니라 사법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기소재량권 남용(濫用)으로 검찰이 불신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유죄협상권이라는 막강한 무기가 주어진다면 자의적 검찰권행사에 대한 우려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진실이 은폐되거나 왜곡될 위험조차 있는 것이다. 기소할 사건과는 무관한 탈세 등의 약점을 잡아 피의자를 굴복시키는 편법수사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검찰은 이 제도의 도입보다는 수사과정을 투명화하고 피의자의 인권을 보장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플리바게닝의 도입 요구는 그 다음이어야 한다. 플리바게닝 도입 전에 우선 변호인의 피의자신문 참여권과 수사기록 열람권이 보장돼야 한다. 또한 수사의 전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고 피의자 신문 과정도 녹음되거나 녹화돼야 한다. 그리고 이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먼저 경제범죄,마약 및 조직범죄 등에 한정하고,그 성과를 분석해 전면적인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제도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플리바게닝 절차에 어떤 식으로든 법원의 관여가 보장돼 사법 불신의 싹이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