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생사. 그 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대상이 첫사랑이다.

젊은 시절의 첫사랑이 가슴 떨리는 설렘으로 찾아온다면 조금 나이를 먹은 후의 첫사랑은 오래된 상처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절반의 실패''혼자 눈뜨는 아침' 등으로 여성문제에 관심을 보여온 소설가 이경자씨(59)의 신작 장편 '천개의 아침'(이룸)은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운명적인 첫사랑 이야기다.

작가가 서른다섯살 무렵 써보려고 시도했다가 '도무지 정직할 수 없어' 접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고향인 강원도 동해항을 배경으로 돌아오지 않는 납북어부의 딸(최수영)과 밀항을 꿈꾸지 않고는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청년(박정환)의 사랑 이야기를 세밀한 문체로 그려낸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던 정환은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양귀비를 재배하다 감옥에 간다.

전과자의 낙인이 찍힌 그가 작은 항구도시 동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외항선원에게 창녀를 알선하거나 자질구레한 밀수품을 운반하는 일 따위뿐이다.

어느날 정환은 술집에서 어머니와 힘들게 살아가는 수영을 만나게 된다.

둘은 첫눈에 이끌리지만 정환이 내막도 모르는 심부름을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면서 헤어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약사가 된 수영은 뉴질랜드에서 온 정환의 소포를 받는다.

소포는 감옥에서 나온 정환이 우여곡절 끝에 건설사 사장으로 성공했으며 가정도 꾸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제서야 수영은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던 정환을 떠나보낸다.

외롭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쓰고 소설 속 인물들과 허물 없이 소통하며 사랑한다는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가난하고 못 배웠던 나의 젊은 시절을 다시 정리하게 됐다"며 "오랜 세월 마음 속에 담아 왔던 인물들을 떠나보내니 허전하면서도 개운하다"고 말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